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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 양의 진노 (계 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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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양의 진노 (계 6:12-17)
  

어린 양이 봉인된 일곱 인 중 첫째 인, 둘 째 인, 셋째 인, 넷째 인을 떼면서 시작되는 각종 재앙은 순교자의 신원이 나타나는 다섯째 인을 떼는 이야기로 전개되었다. 계6:12~17에서 요한은 여섯째 인을 떼는 것을 본다. 사실 요한은 예수님을 인을 뗄 때마다 그 장면을 다 보고 들었다. 계6:3에서만 “내가 들으니”로 되어 있고 계6:2 “내가 보니”, 계6:5 “내가 보니”, 계6:8 “내가 보매”, 계6:9 “내가 보니”이다. 

여기 “내가 본다”, ‘I Saw’에 해당되는 헬라어 에이돈(ε?δον)이란 단어는 헬라어 호라오(?ρ?ω)와 함께 선지자의 환상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영적인 지각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음성을 보고 듣는다는 것이다. 이 단어는 복음서, 사도행전까지 합하여 350회나 나온다. 에이돈의 ‘보다’라는 동사는 경험하다, 주목하다, 즉 확실히 듣고 보았다는 것이다. 신앙은 이만큼 듣는 것, 보는 것의 세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 인을 떼실 때 나타난 재앙은 ‘그럴까, 그런 것이 있나보다’로 받아서는 안된다. ‘I Saw’ 즉 목격한 Fact인 것이다. 

오늘 여섯째 인을 떼실 때 나타난 장면은 무엇인가? 천체계의 이상이다. 질서의 흔들림과 파괴다. 

계6:12~14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진다. 사람들은 이상과 같은 이야기를 허구, 지어낸 이야기로 들으려 한다. 그리고 많은 신령한 이들이 이것을 “영적으로”라는 말을 앞세워 영으로 풀려고 한다. 어떤 이단의 괴수는 “해가 검을 털로 깐 상복 같이 검어지고”를 ‘해’를 예수로 본다. 또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에서 ‘달’은 성령으로 본다. “하늘의 별이 땅에 떨어지고”의 ‘별’은 주의 종으로 본다. 두루마리 말리는 것 같이 되는 하늘을 영적 질서라고 본다. 각 산과 섬은 교회의 은혜라고 본다. 

그러면 무슨 뜻인가? 여섯 째 인을 떼는 재앙은 진리이신 예수가 그 빛을 잃어 쓸모없게 되는 것이고 성령도 무력화되고 주의 종들이 타락하고 영적 질서가 다 파괴되며 결국 교회가 은혜의 처소가 되지 못하고 교회의 구실을 못한다는 것으로 설명도 한다. 이 시대, 마지막 때에 참 목자가 없다. 이 요한계시록을 푸는 나만이 옳다고 가르친다. 이 말씀은 이런 식으로 영으로 푼다고 억지로 말할 것이 아니다. 한국 교회 성도는 너무도 억지로 푸는 것에 감염되어 있다. 가령 예언적인 것, 시대적인 것, 날짜로 알아맞히는 것, 장소와 징조를 일치시키는 것, 성경을 해석해도 꼭 무당이 과거사를 맞추는 것에 관심을 가지듯 호기심을 충족시켜야 되는 것으로 수용하려 한다. 

요한계시록은 이상과 같이 영을 앞세워 억지로 맞춰 놓은 것이 아니다. 

여섯 번째 재앙 이야기는 이렇게 정리된다. 

첫째, 사실 그대로 일어날 천체계의 흔들림이다. (계6:12~14)

이미 이사야는 사13:9~10에서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사34:4에서도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말리되”라고 하였다. 문자적으로 매달리는 해석이라고 거절해서는 안된다. 사실이다. 예수님도 종말과 재림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 마24: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주님의 예언이 어찌 유치한 예언인가? 천체계의 흔들림이 어찌 ‘영적으로’라는 해석으로 피해만 가야 하는가? 

여기 본문은 무섭고 심각한 것이다. 해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빛과 열, 광합성의 에너지원이다. 해가 검어져서 그 빛을 잃고 달도 피 같이 되면 지구 상에 중력과 인력에 문제가 생긴다. 태양에 흑점이 생기는 현상, 일식의 현상이 한순간에 지나가는데도 인력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가? 태양이 검어지는 것은 혹성이 직렬이 될 때 일어난다. 태양계의 혹성 9개가 다 일치하게 되면 지구가 어느 정도 타원형이 된다. 이것은 과학적인 것이다. 그러면 지각이 약한 지역은 대지진이 일어나고 태양의 자전과 공전에 의해 산도 섬들도 옮겨지는 비극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운석은 지구에 떨어질 때 공기의 마찰로 연소되지만 지구 반대편의 공기가 다른 반대편으로 끌려오는 현상에 의해 공기가 희박한 곳에는 운석들이 별들의 땅들이 소낙비처럼 쏟아질 것이다. 실로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열매가 떨어지듯 하늘의 별이 떨어지는 엄청난 재앙은 천문학의 발전으로 인해 가능하고 또 가능한 미래의 가능성이다. 지각판만 조금 움직여도 쓰촨성 지진에 수 만명이 매몰되는데 일본이 일본의 멸망을 영화로 만든 것만 보아도 나라에서는 지각판의 변동을 인위적으로 막으려는 노력을 하지만 되지 않는다. 

여섯째 인을 떼는 날 나타나는 재앙은 천체계의 질서가 무너지는 환난이다. 사람이 만든 차는 하루에도 수십 건의 인사 사고를 내고 충돌하는데 수 억개의 은하로 이루어진 별들의 군단이 질서 속에서 부딪힘 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은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붙들어주시기 때문이다. 손을 놓으면 어찌 끝장이 아니겠는가?

둘째, 천체 흔들림의 재앙은 온 인류에 대한 것이다. (계6:15)

계6: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사람들은 고개를 내밀만큼 담대할 수 없다. 모두 숨게 되는 재앙이다. 여기 사람들은 일곱 가지 지위를 지닌 사람들이다. 7은 언제나 완전수, 이 일곱 사람들의 유형은 각종 입장의 사람들을 대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류를 망라한 것이다.

땅의 임금: 불신앙의 최고 권력자, 
왕족: 상류층의 패밀리로 사는 자, 
장군: 군대를 움직이고 전쟁을 지휘하는 자, 
부자: 돈을 의지하고 돈을 사랑하는 자, 
강한 자: 약자를 괴롭히고 업신여기는 자, 
모든 종: 사람을 믿고 신념을 믿고 헛된 것을 믿고 거기에 노예가 되어 사는 자, 
자유인: 아무 것도 속박될 것 없는 일반인

이들은 인류의 대표들로서 하나님 없이 자신의 육신대로 살고 하나님과 원수되는(롬8:7) 삶을 즐기던 자들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던(롬8:8) 자들이다. 재앙의 인이 떼어지면 너무도 무서워 오히려 산들과 바위에게 대하여 우리에게 떨어져 가리워 달라고 외치게 된다. 단숨에 묻혀서 죽는 것이 나을만큼 지진이 무섭고 산과 섬이 요동치는 것이 무섭기에, 천체계가 흔들리는 것이 무섭기에 “가리워다오 가리워다오” 외치게 된다.

예수님도 눅23:27 이하에서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푸른 나무인 택한 자도 가리워 달라고 하는데 마른 나무인 이방인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아! 두려움의 날이 다가온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인류에게 천체계의 흔들림이 일어난다. 이 두려움을 통과할 수 있는가? 이 마지막 때를 이겨낼 수 있는가?

셋째, 이 여섯 번째 재앙 이야기는 어린 양의 진노다. (계6:16~17)

계6:16中下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어린 양의 진노라고 말한다. 어린 양이라면 온유를 상징한다. 부드럽고 공격의 뿔도 없는 약함을 뜻한다. 그런데 어린 양의 진노라니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처럼, 죽는 날에도 소리조차 내지 않고 죽어가는 어린 양처럼 예수가 맞고 모욕을 당하고 묵묵히 죽음의 십자가로 나갔기에 진노라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 허나 재림의 예수는 권세를 지니셨다. 

다스리는 왕의 권세를 가지셨다. 유대 지파의 사자, 왕 중의 왕같은 사자의 모습이다. 먹이를 물고 찢어버리는 강한 사자의 모습이 다시 오실 주님의 이미지다. 어린 양만 생각하지 말라. 완악한 인간들에게 기회를 주고 경고를 주고 돌아올 회개의 때를 무한정 기다린 주님, 관용으로 시작하고 심판의 날에도 관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린 양은 진노하실 때 그 진노는 너무도 크시다. 계6:17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는 것처럼 아무도 그 앞에 설 수 없다. 

요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히10:29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우리는 사랑만 생각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 어린 양의 진노가 얼마나 중할 것인지를 생각하자. 돌이켜 생각해야 한다. 무서운 진노, 죄와 불신, 불경건, 육신의 삶, 하나님을 기쁘게 못한 삶에 대해 다루실 진노의 두려움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분노에 대해서는 할 말이 너무 많다. 성경 곳곳에 진노, 분노라는 말이 쉴틈없이 나오기 때문이다. 앞으로 계속되는 일곱 번째 인을 뗄 때 나오는 일곱 나팔 재앙, 일곱 번째 나팔을 불 때 다시 전개되는 일곱 대접 재앙을 보면서 재앙과 환난이 점점 점진적으로 커져가고 병행하여 나아가는 것을 보면서 진노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어리석은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신가?
진노의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이 얼마만큼 있는가?
진노하심이 옳은 것인가?

성경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을 다 가지고 있다. 다만 오늘 여섯째 인을 떼실 때 나타난 두려움의 재앙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어린 양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돌이켜 보자. 심판주이신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절규하고 사람들 속에 들어가는 자인가? 당당히 아멘 주 예수여 오서 오시옵소서 하고 말할 수 있는 자인가? 환난 가운데 연단을 받으며 이겨내는 자가 될지언정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지 말라. 불신앙으로 사는 것, 적당히 신앙 생활을 하며 세상 가치관대로 사는 것을 자랑치 말라. 

세상 일에 마음과 정신을 다 빼앗기고 살다가 예수님이 오실 때 후회하지 말라. 지금 늦지 않았다.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 더 중하고 더 긴급한 일은 없다. 오늘 일곱 인을 떼는 재앙에서는 1/4만 심판을 받으니(계6:8) 이 무서운 심판에서 3/4는 재앙을 보고 살아남는다. 다음의 재앙 심판이 계속해서 연속적으로 따라나오지만 기회가 다한 것이 아니다.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는 것이다. 

오늘 이 시간 이 쉬고 있는 안식의 시간도 정돈하는 기회다. 주님 앞에 무서움과 떨림으로 서지 않을 기회다. 기회를 잘못 낭비하지 말자. 요한계시록을 듣는 이 시간이 당신 영혼을 위한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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