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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제사장이 되십시오! (벧전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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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제사장이 되십시오! (벧전 2:4-5)

: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함께 계심을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자신의 자녀로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버려야 합니다.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모하여야 합니다.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야 합니다. 버리고 사모하는 삶은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성도의 삶은 버릴 것을 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추구해 가는 삶입니다.  

터키의 갑바도기아 지역을 순례하면 신비한 풍광에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송이버섯모양의 거대한 바위기둥들이 줄을 지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래전 이곳에 화산활동이 있었고, 화산이 폭발하면서 화산재가 쌓여 회색의 응회암이 되었습니다. 그 후 오랜 기간 동안 풍화작용으로 갈고 다듬어져서 환상적인 모양의 원추형 돌산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박해를 피하여 숨어 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신앙을 지키고 이어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고스라니 간직한 그리스도교의 성지입니다.

이곳에 주상성자(柱上聖者)라고 불리는 시메온(St. Simeon the stylite, 389-459)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상성자라는 말은 기둥 위의 성자라는 말입니다. 이곳의 암석 동굴 또는 기둥에서 수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수행이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받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기둥을 세운 후 그 위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를 유명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기둥 위에서 약 35년간을 수도하였습니다. 그의 이런 모습이 많은 사람을 그곳으로 몰려들게 하였습니다. 또한 그의 철저한 금욕 생활이 많은 사람을 감복시켰습니다.

오늘 이 세상에는 주상성자처럼 철저한 금욕과 절제의 모범을 보이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상성자의 모습을 흉내 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둥에서 내려와 세상에서 예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이것이 오늘 이 세상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할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은 우리를 향하여 나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나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더욱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와야 합니다.
  

I. 나아옴  

예수님께 나아옴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더 가까이 하여야 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4절 말씀입니다.
: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오늘 말씀은 ‘주님께로 가까이 오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벼운 초청이 아닙니다. 나아와야만 한다는 명령의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다[prosevrcomai/프로셀코마이]’라는 말은 ‘접근하다’, ‘가까이 끌어당기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로 반드시 나아가야 하는 것을 알고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아가야 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믿고 어떤 예수님에게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님’이라고 하십니다.

1.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님께 나아오십시오.

우선, 우리는 예수님을 표현하는 말인 ‘산 돌’이 무엇인지 생각하려고 합니다. ‘산 돌’이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들에 있는 돌멩이’가 아니라 ‘산에 있는 돌멩이’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돌멩이가 살아있기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산 돌’이란 살아 있는 돌멩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살아있는 돌멩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돌입니다.

우리는 리빙스턴, 데이빗 리빙스턴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는 서양 사람으로는 최초로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폭포’를 세상에 알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리학자요 탐험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프리카를 사랑한 개척 선교의 시조’라고, 선교사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선교에 헌신한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의학과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로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도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오늘 그를 이야기 하는 이유는 그의 이름이 ‘리빙스턴(Livingstone)’이기 때문입니다. 리빙스턴은 바로 ‘리빙(Living) 스톤(stone)’ 즉 ‘살아있는 돌’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이름에 리빙스턴이라고, 살아있는 돌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바로 오늘 말씀에서 나온 것입니다.

돌의 특징은 단단하게 굳은 것입니다. 돌이 물렁물렁하다면 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돌처럼 굳은 사람’이라는 말에서처럼 돌은 차갑고 인정사정없이 냉정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돌이 살아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이 되지 않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기초가 되는 흔들리지 않는 반석과 같은 분입니다. 그러나 죽어계신 분이 아니라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그를 믿는 사람들을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살아있는 돌이 되셨습니까?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쓸모없이 돌멩이였습니다. 그래서 채찍질하였습니다. 그래서 침 뱉고 희롱하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을 박아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렇게 해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이 버린 돌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돌을 하나님께서 친히 굴려내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분을 다시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으셨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살아 있는 귀한 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엄청난 역설을 봅니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돌을 봅니다.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은 산돌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산 돌이신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활하심으로 산 돌이 되신 예수님께 나아온다는 것은 바로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단지 인정하는 정도 그 이상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도 사람에게 버림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비록 세상에서 배척을 받고 핍박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여주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 다한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다시 살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또한 다시 살게 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활을 또한 믿습니다. 자신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산 돌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죽음의 돌멩이를 굴려내시고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살아있는 돌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이 살아있는 돌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분의 백성으로 선택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산 돌이신 예수님께 가까이 하심으로 자신을 또한 살아있는 돌멩이로 삼아주신 것을 확신하십시오. 죽음의 공포가 우리를 가두려고 할 때에 부활의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예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는 사람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고 승리를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산 돌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신도 산 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산 돌이신 예수님께로 나아온 사람들의 놀라운 모습을 우리는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놀라운 모습으로 세우십니다. 
  

II. 세워짐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 나아오는 목적은 세워지기 위해서입니다. 나아옴은 세워짐을 위해서입니다. 산 돌이신 예수님께 나아와 또한 산 돌이 된 사람들은 무엇으로 세워지는 것입니까? 

5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5a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오늘 말씀은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산 돌과 같은 존재로서, 우리가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우다[oijkodomevw/오이코도메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세우다는 말은 ‘건축자가 되다’ 또는 ‘건축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우리가 스스로 집을 세운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세움을 받는다는 수동의 뜻입니다. 우리는 현재 집으로 세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나아온 목적은 세워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어떤 집으로 세워지는 것입니까? 신령한 집입니다. 여기에서 ‘신령한’이라는 말은 2절 말씀에서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말씀에서의 ‘신령한[logikov"/로기코스]’과는 전혀 다른 말입니다. 2절에서는 ‘말이 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육체적’이 아닌 영적인[pneumatikov"/프뉴마티코스]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신령한 것은 성령님과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님의 의하여 영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1. 우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졌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께 나아온 것은 우리 안에서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신령한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단지’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목이 짧고 배가 부른 작은 항아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단지라는 것은 그 안에 무엇을 넣었느냐는 내용물에 따라서 이름이 달라집니다.

장을 넣으면 장단지가 됩니다. 장도 어떤 장을 넣었느냐에 따라서 이름이 달라집니다. 고추장을 넣으면 고추장단지가 됩니다. 간장을 넣으면 간장단지입니다. 된장을 넣으면 된장단지입니다. 젠장을 넣으면? 젠장단지입니다. 참고로 젠장은 ‘뜻에 맞지 않고 불만스러울 때 혼자 욕으로 하는 말’입니다. 

1980년대에 TV 드라마에 ‘고교생 일기’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주제가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그리움이 많은 고교 시절에 / 무지개를 보듯 내일을 본다 / 이리저리 열린 여러 갈래길 / 우리들은 이제 어디로 갈까 / 물을 담아 두면 물단지 / 꿀을 담아 두면 꿀단지 / 우리들은 꿈단지 꿈을 담아라 / 너와 나는 고교생 진리의 물을 마시자 / 너와 나는 고교생 푸른 풀잎처럼 자라자 (작사:박건호, 노래:민해경)

똑같은 단지이지만 물을 담아 두면 ‘물단지’이고, 꿀을 담아 두면 ‘꿀단지’이고, 꿈을 담아 주면 ‘꿈단지’입니다. 똥을 담아두면 ‘똥단지’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그 마음속에 무엇을 담아 두었느냐 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악한 뜻을 담아 두고 사는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다. 마음에 선한 뜻을 담아 두고 있는 사람은 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마음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그 사람의 영에 어떤 영이 머물러 있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그 사람의 존재가 달라집니다. 그 사람의 영에 성령이 머무시는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영에 악한 영이 머물러 있는 사람은 악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나아와 성령님이 함께 계시는 신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머물러 계시는 집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올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성령님을 주심으로 그 사람을 영에 속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 여러분의 영에 누가 계시느냐고 묻는다면 성령님께서 계신다고 분명하게 말하십시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신에게 성령님께서 계심을 확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심으로 산 돌이 되신 예수님께 나아와 우리 역시 산 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믿는 산 돌은 거룩한 영을 모시는 집으로 세워집니다. 성령님이 거하시는 집에서 할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 받은 우리가 무엇으로 되어짐을 말씀하십니다.
  

III. 되어짐  

정말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신령한 영을 모신 사람들은 무엇이 되는 것입니까?

5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5b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입니다. 구약에서 아론과 그 아들들로 이어지는 제사장들만이 제사장인 줄 알았는데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교황과 교황의 권위에 의하여 세워진 사제들만이 제사장인 줄 알았는데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전통에 서 있으면서도 여전히 안수 받은 목회자들만 제사장인 줄 알았는데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이러니 천지가 개벽할 소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 각각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각 거룩한 제사장으로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서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례받기만 하면, 또는 예배당에 다니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제사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동적으로 제사장이 되는 일이라면 일부러 제사장이 되라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역시 산 돌이 되고, 성령님이 거하심으로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 사람들만이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될지니라[eij"/에이스]’는 말은 동사가 아니라 전치사입니다. 우리들이 마침내 이르러야 할 목적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제사장이 되는데 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어떻게 하다보면 제사장이 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제사장이 되었으니 제사장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에 제사장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신령한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거룩하지 않은 제사장도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이미 제사장이 아닙니다. 신령하지 않으면 제사장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버지가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그 아들들도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제사장이 아니라 예배를 망치는 망나니였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고 하였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으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야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서 살아야 신령한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나서 세상 속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벗어나서 세상 속에서 살아야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게 드리는 제사장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제사장의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 내가 원하는 한 가지 /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 내가 원하는 한 가지 /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구약에서 제사장은 자신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한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령한 사람들이 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과 사이가 멀어진 사람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인도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잃어버린 사람을 찾기 위하여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것은 세상의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러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삶은 선교적인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하여 전도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리는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제사장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것도 예수님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시작하여, 예수님의 통하여, 예수님으로 마치는 사람들입니다. 내 힘과 내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힘과 주님의 능력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제사장으로 사는 것은 멋있고 폼 나는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낮아지는 것이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힘으로만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려워도 제사장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멋지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참으로 여러 이름을 가졌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이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 배우고 따르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이 모든 이름이 우리의 분에 넘치는 어마어마한 것들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라는 이름 역시 너무나도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향하여 가는 사람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우리를 세상 앞에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우리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서셨던 것처럼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서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세상 죄를 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통로가 된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서 복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와, 신령한 사람이 세워졌습니다. 이제, 거룩한 제사장으로 살아야 합니다. 제사장으로 세상 앞에 서시기를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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