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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다와 다말 (창 38:1-7,12-30)

첨부 1


유다와 다말 (창 38:1-7,12-30) 

1. 구약의 요셉은 17세 나이에 형들에 의해 노예로 애굽에 팔려갔습니다. 이때 할아버지 이삭은 168세였고, 아버지 야곱은 108세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로 요셉보다 서너 살 정도 많은 스물 내지 스물한 살 가량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고 있던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으며 지냈습니다. 그러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멀리 세겜 땅에서 양떼를 치고 있는 형들에게 보냈습니다. 형들과 양떼가 잘 있는지 보고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요셉이 형들을 찾아갔을 때 형들은 멀리서 알아보고 그 기회에 요셉을 죽여 버리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형들은 “야, 저기 꿈꾸는 녀석이 온다. 자,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들짐승이 잡아먹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장남 르우벤이 이렇게 말합니다.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피는 흘리지 말자. 여기 들판에 있는 구덩이에 그 아이를 던져 넣기만 하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말자.” 그래서 요셉이 오자 그가 입은 화려한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형들이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데, 마침 이스마엘 상인 한 떼가 길르앗으로부터 오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이냐? 자, 우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말고, 차라리 그 아이를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아넘기자. 아무래도 그 아이는 우리의 형제요, 우리의 피붙이이다.” 

형제들은 유다의 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은 죽음을 면하고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것입니다. 그러나 동생 요셉을 노예로 팔아먹은 형제들은 울며 애걸하는 요셉의 목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았고, 아버지 야곱을 속인 죄책감에 불안하여 아버지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형제들 중 유다는 동생을 팔았다는 상실감으로 그 죄책감이 극에 달하여 아버지와 형제들을 떠나서 피난처를 찾고자 합니다. 

유다가 자신의 괴로움을 달래고, 죄책감에 눌려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할 때, ‘히라’라고 하는 아둘람 사람이 사는 곳으로 가서, 그와 어울려 살았습니다. 다시 말해 우상숭배하는 가나안 사람들과 어울려 산 것입니다. 거기서 유다는 자신의 외로움과 상실감을 채우는 도구로 가나안 여인 수아의 딸을 안식의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유다는 그 이방 여인과 결혼해서 장남 ‘엘’, 차남 ‘오난’, 그리고 삼남 ‘셀라’를 낳았습니다. 유다가 장성한 맏아들 엘을 ‘다말’이라는 이방 여자와 결혼시켰는데, 그 ‘엘’의 행위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셨습니다. ‘엘’은 그 어머니가 가나안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여인이었기 때문에 타락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죽이지 않으시면 안될 만큼 악한 일을 ‘엘’이 행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임을 당한 ‘엘’은 자식도 없었습니다. 당시 가나안은 우상숭배와 더불어 성적으로 극심하게 타락한 곳이었기 때문에 유다가 가나안 여자를 아내로 맞아 낳은 장남 ‘엘’ 역시 가나안의 타락한 죄악에 쉽게 물들었고 그 죄악이 극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죽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비극의 시작은 애초부터 유다가 헤브론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지 아니하고 홀로 떨어져 나가 타락한 가나안 지역에서 그곳 사람들과 더불어 타락한 죄악에 물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 유다는 장남 ‘엘’이 죽자 차남 오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형수와 잠자리를 같이하여 네 형을 위해 자식을 낳아 주는 시동생의 의무를 다하라’ 그러나 오난은 아이를 낳아도 자기 자식이 되지 못할 것을 알고 자식을 낳아 주지 않기 위해서 형수와 관계를 가질 때마다 자식이 생기지 않도록 조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오난의 행위를 악하게 여기시고 오난도 죽이셨습니다. 이때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 ‘네 친정집으로 가서 내 아들 셀라가 성장할 때까지 그대로 지내라.’ 고 말합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셀라도 그 형들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자식 잡아먹는 요부(妖婦), 불길한 여인으로 생각되어 이제 하나 남은 자식까지 죽이겠다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셀라가 장성하면 기별할 테니 친정에 가서 있으라며 막연한 기약만을 주어서 소박을 놓아 내쫓듯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말은 시아버지의 말을 믿고 친정으로 가서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으나 셀라가 장성하여 청년이 되었는데도 유다는 며느리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오늘날에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계대(繼代) 결혼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 제도는 형제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 남은 형제나 친척들이 과부가 된 형수와 결혼해서 죽은 형제의 대를 잇도록 하는 것으로 수혼법(嫂婚法)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 제도의 목적은 첫째, 자식 없이 불쌍히 죽은 형제의 가문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가족과 이름을 기억케 하며 보존케 하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여인이 이방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셋째는 홀로 남아 의지할 데 없는 과부를 제도적으로 보살펴 주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형제는 긍휼과 희생 그리고 형제애로써 이 의무를 준수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이스라엘 사회와 고대 근동 사회에서 널리 퍼져 있었던 이 제도를 모세 시대에 이르러서는 율법으로 성문화하게 되었습니다. 신명기25:5-10입니다. 

(신25:5-10)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취하기를 즐겨하지 아니 하거든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내게 행치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이를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 취하기를 즐겨 아니하노라 하거든 그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할 것이며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 칭할 것이니라.

이러한 계대 결혼을 회피하는 자에게는 모세 당시에는 처형되지는 않았지만 치욕적인 징벌을 가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한편 이 계대 결혼을 통하여 후사를 보게 되면 이 아들이 법적으로 죽은 아버지의 모든 권한을 정식으로 이어받게 됩니다. 그래서 ‘오난’은 형수와의 계대 결혼에 의해 낳은 아들은 법적으로 자신의 자식이 아닌 형의 자식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식이 생기지 않도록 조치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신명기 이전 시대였지만 계대 결혼의 책임을 다 하지 않은 ‘오난’을 하나님께서 죽이신 것입니다. 매우 이기적이며 탐욕적으로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하므로 결혼의 신성함을 모독하는 죄를 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두 아들을 잃게 된 유다는 아들을 셋이나 두었지만 어쩌면 그 대(代)가 끊어질지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얼마 후에 아내 마저 죽었습니다. 


3. 오늘 본문은 창세기 38장입니다. 창세기 37장부터 마지막 50장까지가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는 것을 시작으로 애굽의 총리로 성공하게 되어 야곱의 70명 가족들이 애굽 고센 땅으로 이주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는 말씀이 성취되어가는 하나님의 섭리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15:13-16)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 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그런데 그 창세기 37장부터 50장까지 사이에 뜬금없이 38장에서 요셉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유다’ 이야기가 끼어든 것입니다. 그 이유를 야곱의 유언 축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야곱이 임종이 가까워 오자 12아들들에게 축복하는 가운데 넷째 아들 ‘유다’에게 이렇게 예언적 축복을 합니다. 

(창49:8-12)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유다’라는 이름 자체로도 ‘찬양’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만큼 형제의 찬송이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찬양이 될 것이라는 축복입니다. 유다는 형제들이 함께 요셉을 죽이려고 했을 때 형제의 피를 흘려 나을 것이 무엇이냐며 노예로 팔게 하여 요셉을 죽음 가운데서 건져내게 했었습니다.(창37:26) 

훗날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을 때 형제들이 식량을 구하러 애굽에 왔다가 요셉의 계략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자기 친동생 베냐민이 보고 싶어 모른 체 하며 꾸며낸 사건에 대한 담보물로 베냐민을 요구했습니다. 그 때 유다가 아버지 야곱에게 자신이 담보물이 될 것을 자청했습니다.(창43:9) 그리고 총리 대신 요셉 앞에서 베냐민을 대신하여 자신이 인질이 되어도 좋다며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헤아려 진실하고 의젓하게 변호하기도 했었습니다.(창44:16-34) 

이러한 일련의 유다의 행동들은 형제들에게 찬송을 받을 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한다.”는 것은 ‘홀’(笏)이 왕권을 상징하는 것처럼 장차 유다 지파에서 사자같이 강력한 통치력을 가진 왕이 나올 것이라는 예언적 축복입니다. 이 예언적 축복은 실제 유다 지파 자손인 다윗 왕이 주변 국가들을 모두 정복한데서 성취되기도 했습니다.(삼하8:1-10:19) 

다음으로,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라고 했습니다. ‘실로’는 세상에 메시아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다 지파의 왕권은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계승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혈통적 유다 지파의 왕권이 유다 지파의 자손으로 세상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고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실현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는 축복은 장차 가나안 땅에서 유다의 후손들이 향유하게 될 평화롭고 풍성한 축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궁극적으로는 유다의 후손,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 된 성도들이 누리게 될  평화롭고 풍부하며 건강한 삶을 축복한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이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유다의 가문을 이야기하며, 신약성경 마태복음 1장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서 유다의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계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손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보겠습니다.

(마1:1-3)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이 계보에서 문제는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라는 것입니다. ‘다말’은 분명 유다의 장남 ‘엘’의 아내로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그 첫째 며느리 ‘다말’을 통해 두 아들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시아버지 유다과 며느리 다말과 근친상간을 통해 ‘베레스와 세라’를 낳은 것입니다. 


4. 이 사건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유다는 두 아들을 잃고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내보낸 후 얼마 뒤 아내마저 죽었습니다. 유다는 어느 정도 마음의 위안을 되찾은 다음에 친구인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갔습니다. 이때 친정에 가 있던 다말은 자기 시아버지가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로 올라오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과부의 옷을 벗고 사치스런 장식품이 달린 창녀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하기 위해 광장에 나가 앉았습니다. 

이러한 다말의 계교는 단순히 창녀로 몸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막내 시동생 ‘셀라’가 다 성장했는데도 약속대로 그와 결혼시켜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구책으로 시아버지를 통해서라도 가문의 대를 잇도록 하기 위해서 취한 행동이었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유다는 얼굴을 가린 그녀가 자기 며느리인 줄을 모르고 창녀로 생각해서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합니다. ‘너와 쉬었다 가겠다.’ ‘얼마나 주시겠습니까?’ ‘염소 새끼 한 마리를 보내 주겠다.’ ‘좋습니다. 그 염소를 보낼 때까지 담보물을 잡히시겠습니까?’ ‘담보물로 무엇을 주면 되겠느냐?’ ‘끈 달린 당신이 그 도장과 당신이 들고 있는 그 지팡이를 나에게 주십시오.’ 이렇게 거래를 끝내고 유다는 그녀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으며 다말은 유다를 통해서 임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서 다말은 집으로 가서 면사포를 벗고 과부의 옷을 다시 입었습니다. 다말이 담보물로 도장과 지팡이를 요구한 것은 훗날을 대비하여 뚜렷한 증거물로 남겨 두려는 치밀한 계획에서 나온 것입니다. 

‘도장’은 소유자의 신분과 권리를 나타내는 것이고, ‘지팡이’는 부족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말은 가장 확실한 증거물로서 이것들을 요구했고 유다는 후에 염소 새끼와 교환할 생각으로 선뜻 내주었습니다. 얼마 후 유다는 분위기에 휩쓸려 저지른 자신의 행실이 공개적으로 알려질까 부끄러워, 이런 일에 별로 무감각한 가나안 친구를 통해 화대를 갚고 약조물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당신의 며느리 다말이 창녀짓을 하여 임신하였소.’ 라는 청천벽력같은 소문을 전합니다. 그러자 유다가 ‘그 여자를 끌어내어 불에 태워 죽이라.’ 고 명령합니다.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와 정혼관계에 있는 며느리 다말이었기 때문에 다말이 그 순결을 깨뜨림으로서 가문과 족장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분기탱천하여 화형을 선고한 것입니다. 결국 다말은 끌려나가면서 자기 시아버지에게 이런 전갈을 보냅니다. ‘나는 이 물건 임자 때문에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끈 달린 도장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인지 한번 보십시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놀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창38: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그는 나보다 옳도다.” 이 말은 다말의 행위가 전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처신에 비해 옳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가문의 대를 이르려는 다말이 자기보다 하나님 앞에 더 옳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람의 죄를 판단할 때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어떠한가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의 생명 보존만을 위한 나머지, 그를 통해 자손을 낳아 주도록 했던 다말과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무시해버린 자신의 실책을 솔직히 인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유다는 다말의 행위가 단순히 욕정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잘못과 가문의 자손을 잇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유지하려는 집념에서 행해졌음을 인정하고 다말을 용서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부도덕한 행위를 참으로 회개했다는 뜻입니다.


5. 그 후 다말이 해산할 때 보니 쌍둥이였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먼저 손 하나를 불쑥 내밀었습니다. 그래서 산파가 그 손을 붙잡아 손목에 붉은 실을 잡아매고 ‘이 아이가 먼저 나왔다.’ 며 장자의 표시를 했습니다. 그러나 먼저 손을 내민 그 아이가 도로 손을 안으로 들이고 다른 아이가 나왔습니다. 

그때 산파가 ‘네가 어째서 비집고 나오느냐?’하고 소리치며 그 이름을 ‘베레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서 손목에 붉은 실을 맨 아이가 나오자 그 이름을 ‘세라’ 라고 불렀습니다. 분명 육적 장자는 홍사를 맨 ‘세라’였지만, 성경에 나타난 실제적이고 영적인 장자는 ‘베레스’가 된 것입니다.(창46:12;대상 2:4) 즉 시부와 며느리의 패륜(悖倫)에 의해 출생한 ‘베레스’가 그리스도의 직계 조상이 될 줄은 유다 자신도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유다는 동생을 팔아먹은 사람 중 하나였으며, 나중에는 며느리하고 불륜까지 저지른 사람으로 너무도 지저분하고 추악한 집안이었습니다. 다말이 아니었다면 유다 지파의 계보가 끊어질 수밖에 없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다 지파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야곱이 임종하기 전에 12아들, 12지파를 축복할 때 유다에게 다음과 같이 축복한 것입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실로’란 ‘화평을 가져오는 자’라는 뜻입니다. 가깝게는 다윗을 가리키고 멀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때문에 다말이 아니었더라면 야곱의 유다에 대한 축복이 무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말은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분명히 다말의 행위는 영원히 불문에 붙여야할 스캔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다말은 끊어진 유다의 혈맥을 잇게 하여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이루게 한 헌신적이고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유다의 장남 ‘엘’과 차남 ‘오난’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다윗의 혈통을 이을 수 있는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두고 “하나님 목전에 악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셨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만약 유다가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지 않았더라면 자식의 죽음과 자부의 몸을 통해 후사를 얻게 되는 고통과 수치는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말은 시아버지와 불륜관계를 맺은 사실이 알려지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 무서운 형벌을 감수하고 불륜을 저질러 아들은 낳은 이유는 유다 지파의 혈통을 잇게 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다말은 모든 수치와 멸시와 고난을 참고, 무엇보다 무서운 형벌을 감수하고서라도 유다 지파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목적을 이루어가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다말은 도덕과 윤리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운 여인이었습니다. 

다말은 도덕과 윤리의 벽에 부딪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의 지혜를 발휘한 여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롭고 복된 삶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떠한 어려움을 겪는다 해도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며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어 나가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6.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악독한 왕으로 아합이 있었습니다. 아합은 우상숭배하는 이세벨을 왕비로 맞아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며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서슴없이 핍박하고 학살했습니다. 물론 아합 왕의 그러한 악행은 바알 우상을 숭배하는 이세벨에 충동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상 21:25)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저가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 

이 아합과 이세벨 사이에 ‘아달랴’라는 딸이 있습니다. 이 아달랴가 남 유다 왕 여호람과 결혼했는데 여호람 역시 아달랴의 꼬임에 넘어가 우상숭배하며 악행하므로 하나님께서 치시자 창자가 빠져나오는 중병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에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하시야 역시 그 모친 아달랴의 꼬임에 아합과 같이 우상숭배 등 악행을 서슴지 않자(대하22:3) 

하나님께서 예후를 들어 아하시야를 죽였습니다. 아달랴는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격분해서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하고자 아하시야의 아들들, 즉 자신의 친손자들을 모두 몰살합니다.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하고자 한 것은 곧 다윗의 씨를 진멸하여 다윗 왕의 대를 끊어버리자는 것입니다. 아달랴의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께서 성전을 건축하고자 한 다윗 왕에게 약속하신 말씀 “(삼하7:11-16)....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는 언약을 파기시켜버리려는 어마어마한 흉계입니다. 

야곱이 유다에게 축복한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라는 약속을 파기시키려는 사탄의 흉계입니다. 그러므로 아달랴의 행위는 다윗 왕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악행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반역 행위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아달랴의 행위는 다윗의 씨를 통해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거스리는 악행인 것입니다. 

이렇게 아달랴가 자신의 친손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진멸할 때 제사장의 아내 여호사브앗이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몰래 빼내어 성전으로 피해 6년을 숨어 지냈습니다. 

(대하22:10-12)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하였으나 왕의 딸 여호사브앗이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의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도적하여 내고 저와 그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게 한고로 아달랴가 저를 죽이지 못하였더라. 여호사브앗은 여호람왕의 딸이요 아하시야의 누이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더라 요아스가 저희와 함께 하나님의 전에 육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달랴가 나라를 다스렸더라. 

그리고 7년 후, 제사장 여호야다가 아달랴를 죽이고 온 백성들에게 “(대하23:3) 여호와께서 다윗의 자손에게 대하여 말씀하신대로 왕자가 즉위하여야 할지니라” 며 7살 난 요아스를 왕위에 오르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 왕가가 다시금 회복되어 하나님께서 다윗 왕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루어나가게 되었습니다. 다윗 왕가의 대를 끊으려 한 것은 분명 사탄의 흉계입니다. 

이러한 사탄의 흉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동방박사들에 의해 유다의 왕이 태어났다는 얘기를 듣고 헤롯 왕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두 살 아래의 모든 유아들을 살해한 것입니다.(마2:13-23) 

사탄은 이처럼 지금도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에서 성도들을 끊어 버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택함받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된 성도들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롬8:31-39)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은 다말을 통하여 끊어져 가는 다윗의 혈통을 이어 인류의 구세주 예수그리스도가 오실 수 있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다말은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온갖 수치와 위험을 무릅쓰고 지혜를 다한 여인이었습니다. 다윗 가문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믿음으로 아브람의 자손, 다윗의 자손이 되신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의 언약은 그 누구도 끊을 수 없습니다. 다윗의 가문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사랑과 언약을 굳게 믿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며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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