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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레위인의 어깨로 (대상 13: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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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인의 어깨로 (대상 13:9-14)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나님의 법궤를 자신이 살고 있는 다윗 성으로 옮겨 오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모세가 광야에서 만든 것으로 그 안에 십계명 돌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법궤는 성전이 건축되기 전까지 장막 성소에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였습니다. 또한 전쟁이 있을 때 이 법궤를 앞세우고 나아가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왕이 된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자신이 있는 성으로 가져오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다고 모든 부분에서 완전한 왕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다윗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했습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하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다윗은 법궤를 모셔 오는 일을 하나의 축제로 만들었습니다. 다윗이 행하고자 하는 일을 모든 백성들이 동의했기에 그들은 기쁘게 이 일에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뜻하지 않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법궤가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에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끄는 소들이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만 법궤가 땅바닥으로 떨어지려고 했습니다. 

이 때 옆에서 법궤를 수행하던 웃사가 반사적으로 법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법궤를 손으로 잡은 웃사가 죽고 말았습니다. 웃사가 죽은 이유에 대하여 10절에서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라고 말하고 11절에서 “여호와께서 웃사의 몸을 찢으셨으므로”라고 말함으로 법궤를 손으로 잡은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도하셔서 죽이신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웃사의 죽음은 다윗을 비롯한 모든 백성들에게 법궤를 모셔 오는 일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은 분노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왕으로서 자존심이나 리더십의 상처 그리고 백성들의 따가운 시선보다는 왜 이러한 일이 생겼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앞섰습니다. 다윗은 결국 법궤를 모셔 오는 일을 중단했습니다. 

다윗과 백성들도 처음에는 웃사가 죽은 이유에 대하여 납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선한 의도임에도 불구하고 죽은 웃사를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궤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법궤를 가까이하는 것이 축복은 고사하고 저주가 되었기에 다윗을 비롯한 백성들은 법궤를 가까이하기를 꺼려했습니다. 혹시라도 법궤를 가까이했다가 웃사처럼 죽음을 당하지 않을까 라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법궤를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가져가게 했습니다. 왜 다윗이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법궤를 가져가게 했는지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오벧에돔은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윗의 신하였지만 가드 사람으로 블레셋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법궤를 가져간 것이 다윗의 강제적인 명령이었는지 아니면 오벧에돔의 자발적인 행동이었는지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오벧에돔이 거부하지 않고 법궤를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꺼려하고 두려워했던 법궤를 오벧에돔은 자신의 집으로 가져가 가족이 있는 곳에 두었습니다. 자신의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법궤를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벧에돔의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구레네 사람 시몬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그도 외국인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진 것으로 전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갔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석 달간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석 달이라는 시간 동안 오벧에돔의 집에 하나님의 복이 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4절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오벧에돔이 받은 복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지만 법궤가 머문 석 달이란 짧은 시간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소문이 나며 그 소문이 다윗에게까지 들릴 정도의 큰 복이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오벧에돔이 받은 복은 다윗과 백성들에게 법궤를 모셔 오는 것이 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였습니다. 법궤는 저주나 죽음을 가져오는 무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다윗은 다시 법궤를 모셔 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법궤를 모셔 올 때는 소가 끄는 수레에 실어 운반하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레위인들이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방법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무도 몰랐고 알고 있었다고 해도 대수롭지 않게 그냥 넘어갔습니다.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제사장들도 이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고 법궤를 운반하는 그들의 잘못된 행동 또한 고쳐 주지 못했습니다. 

소가 끄는 수레에 법궤를 실어 운반 하는 방법은 아마도 사무엘상 6장에 나오는 사건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법궤를 블레셋에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법궤를 빼앗아간 블레셋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임한 저주가 법궤 때문인 줄 알고 법궤를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이 때 사용한 것이 소가 끄는 수레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 블레셋이 사용한 방법으로 법궤를 운반했습니다. 이미 율법에 법궤를 운반하는 방법이 있고 하나님의 명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살펴보지 않았습니다. 법궤를 모셔 오는 일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고 세상의 방법대로 했다는 말입니다. 

그 옛날 다윗이 법궤를 모셔 와 가까이 두고 싶어 했던 마음은 오늘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다윗 시대의 법궤는 없어도 우리도 늘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시간입니다. 기도, 찬양, 말씀, 섬김, 교제 등등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신앙적인 행위들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를 사모합니다. 또한 우리는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져온다고 하는 많은 일을 해 보았고 또한 현재 진행 중이기도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의 임재와는 거리가 더욱 멀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고 은혜가 있고 거룩과 능력이 있다고 하는데 오늘 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해 왔고 또한 행하고 있는 많은 일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하고 하나님의 은혜, 영광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줍니다. 

그러는 사이 우리 주변에는 제2의 웃사와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교회의 일에 적극적으로 헌신하고 신앙을 위해 자신을 희생함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바로 제2의 웃사의 비극입니다. 성도들의 물질적인 헌신과 섬김이 교회의 외형만 크게 만들고 또한 교회와 목회자들을 타락시키기도 하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또한 성도들의 전도와 선교라는 선한 의도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수준 이하의 행위들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는 일들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로 끝나고 마는 것을 주변에서 보게 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일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 복을 받는 비결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며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가져오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 번 정한 일이면 끝까지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2의 웃사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도 개의치 않습니다. 자신의 리더십이 더 중요하고 자신의 체면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와중에 하나님의 임재는 사람들에게 거리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성도들도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마음도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영광, 이런 것들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더더욱 교회를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선들은 성도들에게 교회를 가까이하고 열심 있는 신앙 생활을 하기에 부담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오늘 우리가 직면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지금 기돈의 타작 마당에서 웃사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심정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다윗처럼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예배, 기도, 찬양, 신앙 생활을 다시 살펴보고 말씀에서 떠난 것들이 있다면 다시 돌이켜야 합니다. 다윗은 왕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리더십과 체면이 손상되는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꺼려하던 법궤를 오벧에돔이 모셔 드린 것 같이 우리도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열심을 내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따가운 눈총을 보낼지라도 우리의 열심을 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 광야교회가 오벧에돔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하나님을 말씀대로 온전히 섬기는 가족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것이 복이 되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끝으로 법궤는 소가 끄는 수레가 아니라 구별된 레위인의 어깨로 메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율법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기계적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유행하는 것들을 교회가 도입한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화려하게 만들고 첨단 무대 조명을 설치하고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음악과 악기들, 놀라운 가창력의 싱어들, 그리고 감성을 자극하는 설교가 있는 집회, 그런 곳에 간다고 자동적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 자신이 구별된 레위인들과 같이 철저히 말씀으로 구별되며 그 말씀을 실행할 때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예배가 되어야 하나님의 임재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말씀에 대한 헌신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임재를 가져 오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준행하고 지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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