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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맹인이 되었더라면 (요 9: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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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이 되었더라면 (요 9:35-41)


한 소경이 지팡이로 길을 더듬거리면서 박물관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박물관을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합니까?” 라고 한 행인에게 물었습니다. 
“아, 박물관이라구요. 그곳에 가시려면 다음 모퉁이에서 왼쪽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틀렸어요. 그곳에 가려면 지금 가시던 길로 쭉 가서 세 번째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한참을 서서 서로 자기의 말이 옳다고 우겨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순경이 나타나서 “미안합니다. 당신들이 좀 비키셔야 되겠습니다. 지금 당신들은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모두 소경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으면서 보는 양 자기가 옳다고 우겨대는 소경들. 이들의 모습이 어쩌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만큼 답답한 일이 있을까요? 물론 우리 몸에 불편함이나 고통이 있으면, 그것이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이든, 아니면 손가락이나 발에 생긴 것이든,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과 불편 중에서 앞을 못보는 것만큼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지팡이를 가지고 길을 더듬어서 갈 수는 있다고 해도 내 키만큼 위로 장애물이 있다고 할 때 그 장애물을 무엇으로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칫 머리를 부딪쳐 혼이 난 적이 어찌 한두 번이겠습니까? 그런걸 생각해보면 앞 못보는 사람들은 정말 어떻게 살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미국의 모 대학 총장이 자기가 겪었던 간단한 에피소드를 기록했는데 이 대학 총장이 사는 모 지방 도시 번화가 옆에 조그마한 공터가 있는데 그곳에는 언제나 맹인 한 명이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손에는 작은 컵 하나를 든 채 서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총장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 맹인이 구걸하는 것을 보고 호주머니에 있던 25센트 짜리 동전 하나를 끄집어내어 그 컵 속에다 넣어 주었습니다. 25센트 짜리 동전을 던져 넣고 몇 발자국을 지나왔는데 뭔가 낌새가 이상해서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구걸하던 맹인이 검은 안경을 위로 치켜들고 컵에서 그 동전을 꺼내들고는 얼마 짜린가 하고 들여다보고 있더랍니다.

그 모습이 하도 이상해서 그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되돌아 와 가지고 “여보, 당신은 앞을 못 보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돈을 들여다보며 살피고 있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사실 저는 맹인이 아닙니다.” “아니, 맹인이 아니면서 왜 맹인인체 하고 구걸을 하고 있는 거요?” “예, 원래 여기에 서서 구걸하던 맹인이 제 친구인데요, 잠깐 없는 동안 제가 대신 서 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 당신의 맹인 친구는 어디에 간 거요?” “저 앞에 있는 영화관에 영화 구경하러 갔습니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맹인이라도 이렇게 조금 웃어가면서 살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나라는 아직 맹인들이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배려를 해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사셨던 그 시대에는 더욱 심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앞을 못 보는 사람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부모로부터도 버림을 당하여 혼자서 구걸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 목숨을 부지하다 죽으면 그만인 그런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다가 군중들이 그 말씀에 반발하며 손에 돌을 들고 치려고 하자 그 살벌한 분위기를 피해서 성전 밖으로 걸어 나오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눈에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이 막대기를 가지고 더듬거리면서 지나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그를 가리키며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것 보십시오. 저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은 누구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가 많아 저렇게 되었습니까? 아니면 조상들의 죄가 많아 저렇게 되었습니까?” 
그랬더니 예수님은 유명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가 맹인이 된 것은 자기 죄 때문도 아니요, 그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큰 일을 나타내시려고 맹인이 되게 하셨다.” 
그리고는 그 사람을 불러 침으로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준 다음 실로암 못에 가서 씻게 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 말씀대로 실로암 못에 가서 그 눈을 씻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눈을 열어주셔서 밝히 보게 하신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고쳐주신 이유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지음을 받은 것 중에서 어느 것 하나도 그분 없이 지어진 것이 없습니다. 그분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세상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했지만, 어두움은 그 빛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참빛이 있었습니다. 그 빛은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췄습니다. 참빛이 되신 말씀이 세상에 계셨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통하여 지음을 받았는데도, 그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분은 자기의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요한도 고백하거니와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입니다. 그러므로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구원자 되심을 드러내어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믿도록 하기 위해 주님이 이 환자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 사실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나는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들은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보지 못하던 자라도 눈을 떠서 보게 될 것이고, 예수님을 거역하는 자는 본다고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영원히 보지 못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보지 못하던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보지 못하게 하심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사실 제자들이 말하는 바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입니까 하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운명론입니다. 이 세상은 어디를 가든지 이 운명론에 매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네만 하더라도 사주팔자라고 해서 너는 그렇게 살도록 되어 있다고 하는 운명론에 많이 매여 있습니다. 자 팔자 소관이라고 합니다. 그게 니 팔자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티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리라고 합니다.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전생의 죄 때문에 지금 니가 그런 모습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지금 내 할 탓에 따라 다음 생은 좀 더 멋진 생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버러지 같은 생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다 숙명론입니다. 회교도들은 흔히 인샬라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다 신의 뜻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어도 인샬라 나쁜 일이 있어도 인샬라라고 합니다. 다 신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니 거기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그 사람의 생애를 통해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모두는 다 죄 가운데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정해진 대로라면 다 심판의 대상이요 죽어 심판을 받고 불못에 던져질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인생을 하나님게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천국으로 우리 모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직접 열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값을 자기 생명으로 갚아주신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소나 양 염소나 비둘기로 그 죄값을 치루었습니다. 내 죄 때문에 대신 소나 양이나 염소 비둘기가 죽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단번에 여원한 속죄의 길을 마련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어린 양되신 주님의 목숨으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하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우리 심령에 뿌리심으로 마치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집에 죽음의 재앙이 지나간 것처럼 우리들의 생명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에게 이 효력이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믿고 순종하는 사람만이 이 은혜를 덧입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바 이 맹인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께서 그 눈에 침을 뱉여 짓이긴 진흙을 바르고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을 때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눈을 떠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평생 앞을 보지 못하는 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 사람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태어나면서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두 가지 복을 받았습니다. 한 가지는 자신이 맹인으로 태어난 이유가 본인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예수님의 해석을 직접 들음으로 더 이상 자신의 삶이 비극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너는 그렇게 살 팔자라고 모두가 말하던 운명론에서 벗어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실제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상 그 누구도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나 눈을 떠서 보게 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눈을 떠서 보게 된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신대로 순종함으로 눈을 떠서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순종하면 눈을 뜨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그 말씀에 무언가 하나님의 일이 자신을 통해서 나타나게 될 것임을 믿었는데 놀랍게도 그것이 눈을 떠서 보게 되는 것이라고는 아마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기까지도 상상조차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육신의눈만 뜨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영의 눈도 뜨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 하나님의 영광은 다름 아닌 영생의 복입니다. 

네가 어떻게 보게 되었느냐고 묻는 바리새인들의 물음에 처음에는 그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라고 하는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바리새인들이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라고 해서 이제는 초점은 자기의 순종이 아닌 예수께 맞춥니다. 예수가 치료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습니다.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기를 “선지자입니다”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살던 여인도 그랬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남편이 없다”고 말했다가, 예수님께서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 하시는 말씀에 여인은 “당신은 선지자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녀의 관점이 유대인 남자에서 선지자로 한 단계 발전한 것입니다. 이건 눈을 떠서 보게된 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선지자라는 생각을 갖고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하다가 나중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온다’고 말씀하시자, 수가성의 여인이 ‘그럼,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인가요?’라고 묻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그 여인의 생각도 차츰 변해 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바리새인들은 소경이었던 사람을 붙잡고 말을 하다가 통하지 않자, 그의 부모를 불러왔습니다. 하지만 그 부모들은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하고 슬쩍 물러섭니다.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서 이릅니다.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그랬더니 이 사람이 말합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다시 묻습니다.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정말 지겹도록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거는 꼭 자기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하도록 강요하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오리려 이 사람은 아주 당돌하게 한 마디 더합니다.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결국 할 말을 잃은 바리새인들이 이 사람에게 욕을 퍼부으며 말합니다.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러자 이 사람이 비꼬듯 한 마디를 더합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결국 한 말이 없어진 바리새인들이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그를 쫓아내어 보내고 맙니다.

어떻게 이 맹인어었던 사람이 이렇게 용감하게 바리새인들과 맞설 수 있었습니까? 그건 지금 자기가 눈을 떠서 보게 된 이 현실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자기의 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체험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더 이상 우리를 두렵게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는 바 하나님은 우리의 아빠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에게는 능치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이 좋은 것으로 주시는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가 우리 가운데 날마다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우리를 찾아와 만나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처음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 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를 찾아가셔서 만나셨습니다. 맹인이 자기를 고쳐 달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를 만져 주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작정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친히 우리를 만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뜻을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만남은 이뤄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만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 맹인이었던 사람으로 보게 한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닙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 사람이 바리새인들에게 쫓겨났다는 말을 듣고는 다시금 이 사람을 찾아가 만나주십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맹인이었던 사람을 다시 만나주시지 않았다면, 그는 평생 혼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나의 눈을 뜨게 해주신 어떤 절대자다’라고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를 직접 만나주셨습니다. 여기에 말씀의 핵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직접 만나야 하는 대상입니다. 우리의 지식적으로 신앙적으로 윤리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분이 아니라, 반드시 만나야 하는 분입니다.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과 만나서 확인하는 것은 천양지차입니다. 

중요한 것은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 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친히 그를 찾아가셔서 만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를 만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그분의 뜻을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만남은 이뤄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를 만나려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맹인이었던 사람을 만나자마자 물으셨습니다. 

“너는 인자를 믿느냐?”
이에 맹인이었던 그 사람이 겸손하게 대답합니다.
“선생님, 인자가 누구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그분을 믿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미 그분을 보았다. 지금 너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도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그로다’하고 분명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여인은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기뻐하며 동네로 달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여인을 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에게 ‘가라,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의 못 자국, 창 자국을 봤다고 얘기해 줘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도마야, 내 손과 옆구리를 봐라’ 하며 친히 보여 주시자 그제서야 도마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제가 믿습니다.’ 

도마의 두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고 귀신이 나가는 기적의 순간이 지난 뒤에 ‘내게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쳐준 사람이 누구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다가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드디어 맹인이었던 사람의 두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의 가슴은 놀랍도록 방망이질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눈을 뜬 것도 귀하지만 자신의 눈을 뜨게 한 그분이 메시야라는 사실이 그리고 그 메시야를 지금 자기가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벅차서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 감격과 기쁨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제가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여러 일들로 갈등하고, 때로 미숙한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종종 품게 되는 질문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닌가? 구원자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구원자요 전능하신 분이시라면 어찌해서 내가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을 그냥 지켜만 보고 계시는 것일까 하며 섭섭해 하기도 하고 때로는 원망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여기 맹인었던 사람이 바리새인들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리다가 마지막에는 내쫓김을 당한 것처럼 아주 큰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 내쫓겼다는 것은 출교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회당에서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에서 출교를 당한다 교회에서 쫓겨난다고 해서 겁낼 사람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 사회는 다릅니다. 모두가 다 유대교를 믿습니다. 모든 사회가 유대교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회당에서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결국 생활의 모든 기반이 다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누구도 그를 상대해주지조차 않습니다. 완전 왕따요 외톨이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먹고 사는 것조차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이 다시 찾아 만나 주실 뿐 아니라 자신이 인자 즉 메시야임을 알려주십니다. 이에 저는 “주님, 제가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고 예수님은 다시금 선포하십니다. 
“나는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들은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영생의 소망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영원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또한 우리를 돕는 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의 나의 도움이시오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만큼 귀한 것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주를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먼저 찾아오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인간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주시고 모든 고민, 절망, 고통과 괴로움에서 건져주십니다. 허무, 권태 등을 깨끗이 씻어주십니다. 삶에 희망과 복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만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는 체험을 하시길 바랍니다. 

로마서 11장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을 주셨다." 하나님이 혼미한 심령을 주신 사람은 평생을 못 봅니다. 그래서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다고 해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맹인 중에 자기가 보고 싶다고 해서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빛을 더 환하게 밝혀준다고 해서 볼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맹인 앞에서는 빛이 밝게 빛나는 대낮이나 빛이 없는 칠흑과 같은 한밤중이나 못 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맹인이 보려면 시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영적으로도 눈이 열리려면 하나님이 그 눈을 열어주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상하게 열어주시지 않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더욱이 스스로 눈을 열고 싶어하지도 않고 보고싶어 하지도 않는 그런 불행한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환하게 비치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는데도 그분을 보지 못하는 캄캄한 눈을 가지고 살다가 영원히 그 눈을 뜨지 못한 채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 모두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성령을 통해 우리 눈을 활짝 열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침으로 흙을 이겨 맹인 되었던 우리의 마음의 눈에 발라주셨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 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믿을 수 있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 믿음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복도 우리가 눈을 열어 볼 수 있기를 바라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마 약속하신 모든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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