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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겔 37:1-6)

첨부 1


종교개혁 (겔 37:1-6)


I. 변하지 않으면 망한다

바다에 보리새우란 놈이 있습니다. 허물을 많이 벗어야 살 수 있습니다. 어릴 때는 허물이 부드러워서 자주 허물을 벗습니다. 점점 시간이 지나가면서 허물은 딱딱해져가고 벗는 텀이 길어집니다. 그러다가 허물이 딱딱해져서 더 이상 허물을 벗지 못하면 그 허물에 갇혀 보리새우는 죽어갑니다.

교회도 기업도 세상사가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나만 가만히 있으면 망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지 495주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Reformation = form 을 새롭게 한다. 본래의 form으로 돌아간다. 
본래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종교개혁은 성경으로의 환원운동입니다. 
초대교회로의 환원운동입니다. 주님의 가슴속에 있던 그 본래의 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저희교회는 평신도의 은사를 극대화하는 목장중심교회입니다. 
빌 백헴 목사님은 이 운동을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설파했습니다. 
종교개혁은 교리의 개혁, 예배의 갱신, 사역의 개혁이었습니다.

첫 번째 종교개혁이 성직자들의 손에 있던 성경을 빼앗아서 성도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었다고 하면, 두 번째 종교개혁은 목회자들의 손에만 머물러있던 사역을 빼앗아서 모든 성도들에게 나누어주는 운동입니다.

한국교회를 자주 방문했던 영국이 낳은 훌륭한 강해설교가 데니스 레인 목사님은 한국교회를 향하여 뼈있는 충고를 남겼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자랑만 하지는 마시오. 한국교회도 이제 변하지 않으면 시대속에 버려진 창고나 박물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100년전 영국은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교회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하고 자랑스럽던 영국교회는 지금 텅텅 비어있고, 박물관처럼 전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50년 100년후 한국교회가 지금의 영국교회와 같이 되지 않는다는 어떤 보장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차분이 그리고 겸손히 내일을 준비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들이 과장과 허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들이 마지막 때를 준비하고 있는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절망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추수 때가 되었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십시오. 희어져 수많은 죽어 가는 영혼들이 한국교회에 커다란 기대를 보내며 살려달라 애원하고 있습니다. 추수할 때입니다.

우리는 지금 가장 위대한 영혼의 대추수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계도처에서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21세기의 추수를 우연에 맡기지 않으십니다. 멋진 승리를 계획하는 명장처럼 멋진 작전을 가지고 계십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추수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처참한 몰락이냐? 엄청난 추수냐? 우리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방법들을 찾아야 합니다. 
이 몸부림은 일종의 혁명적인 몸부림입니다. 그래서 제2의 종교개혁이 됩니다.

II. 본문의 이해

오늘 본문을(겔37:) 연극무대 위에 올려봅니다. 여러분을 극장으로 초대합니다.  연극의 제목이「마른뼈 골짜기」입니다.

① 남루한 옷차림의 한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으로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입니다.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부정과 부패를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열방을 의지한 죄를 회개하십시오. 위정자들도 국민들도 회개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이 나라는 망하게 될 것입니다.” 자그만치 200백년 동안 수많은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② 잠시 백성들의 모습이 비춰집니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한발과 재난, 땅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있습니다.

③ 그래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대왕이 수많은 군대를 끌고 쳐들어 옵니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옵니다. 도처에서 비명소리로 가득합니다.

④ 비극적인 장면들이 계속 지나갑니다. 

유대 왕은 두 눈이 뽑힌채 쇠사슬에 묶여 개처럼 끌려갑니다. 그토록 화려했던 예루살렘 성전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립니다. 건장한 젊은이들이 포로로 질질 끌려갑니다. 성전과 회당에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습니다. 마을마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여인들과 아이들은 먹을 것을 찾아 산지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이런 비극적 역사가 7년동안이나 계속되어졌고 골짜기마다 마른 뼈로 흘러 넘쳤습니다.

장면이 바뀌어집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포로의 한 사람으로 강가를 거닐고 있을 때에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에스겔아 너는 나를 따르라”(겔1:1)  
한 골짜기에 다다랐더니 그 골짜기 처처에 마른 뼈들로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에게 희망이 있겠느냐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그래서 이 연극의 주제는 “마른 뼈에도 소망이 있는가?” 입니다.

마른 뼈 골짜기의 상황을 오늘 본문 2절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① 뼈가 심히 많다는 말은 절망의 상태가 온 백성에게 퍼져있었음을 말합니다. 전 민족적인 참상이었다.
② 아주 말랐다고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영적으로 재생의 기운이 전혀 없었습니다.
③ 뼈가 온 지면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뼈는 본래 땅속에 묻혀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지 못하니 보기에 흉하고 더럽고 무섭기만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너무나도 비참하게 죽었기에 장사지내 줄 사람이 없었던 게지요. 버려진 시체 - 짐승들이 뜯어먹었습니다. 하늘을 날던 독수리 까마귀가 뜯어먹었습니다. 뼈들은 이리저리 굴러다닙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수치가 열방 앞에 여지없이 드러난 상황이었습니다. 7년동안 이 비극은 계속되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은 1500년전 천주교회가 생겨나면서 시작하여 지금부터 500년전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시 천주교회의 비참한 모습, 교회의 앙상한 뼈만 남은 바로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이 뼈들은 이스라엘 족속이라”고 기록합니다. 
여기 앙상한 뼈들은 7000만 내 민족입니다. 굶주린 내 동포들입니다. 
영적으로 메마른 한국교회요 내 교회요 내 영혼일 수 있습니다. 
500년전 종교개혁이 Orthodox(정통) - 즉 성경적 교리를 찾기위한 개혁이었다면 지금은 Orthopraxis(정행) - 성경적 생활을 찾기위한 몸부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에스겔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이 마른뼈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살려내라는 것입니다. 어느날 루터와 칼빈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마른뼈처럼 화석화되어지고 조직화되고 타락하여 죽어 넘어진 천주교회로부터 생명있는 군대, 생명력 넘치는 교회를 찾아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교회와 한국교회에 주신 사명이 여기에 있습니다. 
죽은 영혼 살려내고, 죽은 교회 살려내고,  민족을 구원하는, 세계 열방을 구원하는 교회를 만들어 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린 한국교회를 살려내 안으로는 자신감을 - 밖으로는 신뢰감을 회복하라는 겁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자리에 인간의 가르침을 첨가하려는 인본주의 종교에 맞서 
- Sola Scripture 오직 성경을 외쳤습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행위나 선행도 필요하다는 주장에 맞서 
-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기쁜 소식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Sola Gratia 오직 은혜의 복음을 주장했습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고 오직 은혜로 산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복음의 본질을 되찾아 냈습니다. 

여러분의 동의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헌신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루터만큼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님 이 교회가 주님의 심장속에 있는 그 교회를 이루어 가기를 원합니다. 울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 비전에 이글거리며 뜨겁게 타오르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들은 이 시대의 루터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III. 천주교로부터

종교개혁의 첫 번째 영역은 아무래도 기독교 복음을 왜곡시키고 저질화시켰던 천주교로부터 주님이 전해 주셨던 원래의 복음, 복음의 원형을 회복하는 복음의 회복, 진리의 회복운동입니다. 

장신대총장 김명룡교수의 강연을 보면 마리아께 기도하는게 유효할까요? 
카톨리교회에서는 유효한 정도가 아니라 가능한 대로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마리아에게 기도하면 예수님은 효성이 지극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마리아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 기도는 가능한 한 마리에게 하곤 합니다.

마리아 신학자로 유명한 카톨릭 신학자 성 리구리란 분이 「마리의 영광」이란 책을 썼는데 거기에 보면 한 환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환상 중에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봤습니다. 왼쪽 끝에는 예수님이 서 계시고 오른쪽 끝에는 마리아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왼쪽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중간쯤 올라가다가 위를 보니 위에는 주님이 계시는데 너무나도 무서운 얼굴로 보고 계시는 겁니다. 그 사람이 놀라서 떨어지는데 그때 하늘에서부터 소리가 들려 오기를 “오른쪽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오른쪽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더니 성모 마리아가 자애롭게 맞아주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마리아가 이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에게 뭔가를 얘기 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님보다 마리아가 더 인자한 성품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성경의 진리를 인간의 행위로, 교황의 말씀으로, 덧칠한 크나큰 오류외에도 이처럼 로마 천주교회는 진리를 잘못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가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직접 하나님께 고백하여 용서받는 것이라면 카톨릭은 간접적으로 만나고 사제를 통해 용서받는 간접적인 종교로 만들었습니다. 신성한 기독교를 인본주의 종교로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 종교개혁을 통하여 이러한 진리, 교리의 개혁은 상당부분 원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개혁은 완성되지 못한 미완성 교향곡이 되었고, 사역의 개혁은 큰 시도조차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은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과제가 되었습니다.

IV. 예배와 사역의 개혁

전세계의 살아있는 교회들은 한결같이 예배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을 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살고 사람이 살고 민족이 살아납니다.

저 자신도 한소망교회를 개척한 이후 지난 20년동안 지속적인 관심이 어떻게 하면 우리의 예배를 주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성경의 백성들이 드렸던 바로 그 예배,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이 행복해 하고 은혜를 누리는 그런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꾸준히 고백해 왔습니다. 지금 우리교회 주일 예배는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고 더 많이 기도할 것이지만 나름대로 가장 성경적이고 가장 한국적이고 가장 예배학적인 모델을 발견한 것으로 자부할만 합니다.

장로회 신학대학이 발간하는 신학연구지 「교회와 신학」잡지에 - 영광스런 경배와 찬양이 있는 예배 : 한소망교회 예배 이야기 - 라는 글이 실려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매주일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우리교회 예배를 탐방하기 위해 찾아오곤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화려한 프로그램이나 거대한 예배당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한 그 자녀들의 총제적인 반응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요 사귐입니다. 때문에 예배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예배에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 크게 보이거나 생각이 많이 나면 안됩니다. 사람이 영광을 받거나 강조되는 일은 되도록 절제되어야 합니다. 

지나치게 웅장한 강단이나 강대상, 권위적인 강단은 검소하게 바꾸는 것이 좋습니다. 강단위에 설교자나 기도자가 앉는 권위적인 의자는 성도들의 위치로 내려오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심지어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설교자도 감추어져야 합니다. 특별한 가운이나 장식, 박사학위를 표시하는 무늬들 등은 의도적으로 검소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먼저 가장 영광스런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보여주려고 하다가 예배에 실패하면 안됩니다. 

가끔 한국교회 안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자가 예배를 인도만 하지 자기 자신이 가장 영광스런 예배자요, 가장 영광스런 예배를 보여주는 자임을 망각할 때에 자기 자신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할 때마다 우리는 성경의 백성들이 어떻게 예배했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지난번 교회에 있을 때에 어떻게 예배했는지 생각하지 마시고, 어떤 예배가 나를 기쁘게 하는가를 생각하지 마시고, 성경의 백성들은 어떻게 예배했는가? 주님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예배는 어떤 예배일까?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배시간마다 반드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몸을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시간을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때묻은 것, 저는 것, 흠이 있는 짐승을 드릴 수 없습니다. 물질을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인격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 가치를 드리는 것입니다. 내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한소망 가족 여러분!  한국 교회 예배가 살아날 때에 에스겔이 보았던 그 마른 뼈 같은 영혼들이, 교회들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교리의 개혁, 진리의 개혁 그리고 예배의 갱신과 함께 마지막 남은 과제가 사역의 개혁입니다.

개역번역 에베소서 4장 11-12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거기 보면 한소망교회 목사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한소망교회 목사가 존재하는 이유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함이라”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에 의하면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도, 목회를 하는 것도, 교회를 세우는 것도, 목사의 사역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번역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개역개정판에서는 “며”자를 “여”자로 바꾸어 번역했습니다. “이는 목사가 교회에 존재하는 이유는 성도를 온전케 하여, 성도를 온전케 함으로써 성도로 하여금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함이라”

목사의 사역이 따로 있습니다. 성도들의 사역이 따로 있습니다. 목사의 사역은 성도를 온전케 하는 사역이며, 성도들의 사역은 봉사의 일을 하고 그리스도의 몸, 셀을 세우는 것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기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의 사역인-

1. 성도를 온전케 한다는 성도들의 흠과 티가 없도록 도와준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에스겔이 보았던 마른뼈 골짜기에 팔뼈, 다리뼈, 두개골들이 사방에 흩어져있습니다. 그 뼈들을 제 위치에 정확히 갖다 놓아서 팔은 팔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다리는 다리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머리는 머리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입은 입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제 위치에 끼어 맞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준비시켜서. 구비시켜서. 

목사의 해야될 일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를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은 성도를 구비시키는 것입니다.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제 자리에 갖다 놓는 것입니다. 

2.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원래 이 봉사란 말은 가족이란 단어에서 왔습니다. 가족은 오이코스, 봉사는 오이코노모스입니다. 가족을 위하여, 배고픈 가족을 위하여, 밥을 짓는 어머니의 손길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추운 가족들을 위하여 옷가지를 챙기고, 떨어진 옷을 깁는 어머니 바느질 손을 -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셀에서 아파하는 사람들과 함께 울어 주는 사역을 말합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나의 격려와 칭찬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격려하는 것을 말합니다. 셀 안에서 함께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에 함께 기뻐해 주는 활동을 말합니다. 배고픈 내 셀 멤버들을 가족들을 위하여 밥을 짓는 손길을 말합니다. 봉사의 사역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섬겨주는 목회 사역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가는 것입니다. 

목사가 사역할 때 전통적인 교회에서 이 모든 일들을 목사들이 감당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일들은 효과적이지 못했습니다. 열매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디자인하신 참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사역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도들이 써야될 면류관을 그동안 우리 목회자들이 빼앗아서 모두 짓밟고 만 것입니다. 

십부장이 해야될 일도 구역을 섬기는 일들도 교육하고 훈련하는 일들도 심방하는 일들도 아픈 사람들과 함께 울어주는 일들도 교인들이 기뻐할 때 함께 춤추는 일들도 모두 목사 혼자 그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이제는 성도들에게 이 모자를 나누어 주어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주님이 디자인하신 참된 교회의 성도들이 되었을 때에 셀의 지도자가 되십시오. You can be a Leader. 당신도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셀의 지도자가 되십시오. 예배를 섬기는 사역자가 되십시오. 셀의 사역자가 되십시오. 이것이 주님이 디자인하신 참된 교회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것이 제2의 종교개혁에 완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V.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이 골짝 저 골짝 수북수북 쌓여 굴러다니는 마른 뼈들을 바라보는 선지자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고 있으나 어디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안타까와 하는 남편을 바라보아야 하는 아내들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이제는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고 진리의 오묘한 세계를 맛보며 영광스럽게 신앙생활을 할 때도 되었건만 여전히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성도들을 바라보아야 되는 목회자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두 눈이 빠진채 마귀에게 질질끌려가는 지도자를 쳐다보아야 했던 백성들 성도들의 마음을 볼 때 어떠할까요?  무너진 성전, 폐허가 다 된 예배를 바라보아야 했던 제사장들의 예배를 바라보아야 했던 마음은 어떠할까요?

바로 이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3절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이 뼈들에게 희망이 있느냐. 
너희 민족에게 희망이 있느냐.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느냐.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희망을 걸어도 좋으냐 그 얘기입니다.

가령 산소 호흡기를 꽂고 숨을 할딱거리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느냐고 하면 Yes라고 대답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바싹 마른 뼈들을 향하여 여기 희망이 있느냐 물었을 때에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한다는 것은 쉬운 대답이 아니지요.  그러나 그렇게 물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에스겔은 대답합니다. 
“주여 주께서 물으시오니 주께 대답이 있나이다.  주님이 원하시면 주님이 하실 수 있나이다.  주님만이 하실 수 있나이다.” 주님만이 원하시면 이 민족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휴전선은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새로운 부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전무후무한 부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주님 앞에 영광스럽게 쓰임받을 수가 있습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할렐루야!

이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종아 이 모든 뼈들에게 외치라! 너희 속에 말씀이 들어가면 살아나리라. 메마른 뼈들에게 생기가 불어오면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살아나리라. 마른 뼈다귀같은 내 심령에 말씀이 들어가면 살아납니다. 오 성령이여 우리가운데 오시옵소서. 우리가 성령님을 환영합니다. 여기 충만케하시옵소서. 성령을 호흡하면 살아납니다.

어떻게 생동감 넘치는 예배를 창출할 수 있습니까? 말씀이 살아나야 합니다.  성령이 도와 주셔야 됩니다. 주님 앞에 찾아나올 때마다 여러분 성령을 호흡하셔야 됩니다.

어떻게 여러분의 가정이 살아날 수 있습니까? 말씀이 여러분의 가정에 선포되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믿음으로 고백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여러분의 자녀들을 움켜쥐고 붙들어 사용해 주셔야만이 여러분의 가정이 살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한국교회가 살아날 수 있습니까? 이 강당이 살아나야 됩니다. 성령이 역사해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머리마다 성령이 역사해 주실 때에 한국교회가 새로워 질 수 있습니다. 살아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말씀안에서 성령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성령안에서 말씀안에서 무엇이 우리를 절망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종합병원 내과 전문의의 고백입니다. 의사가 된 것을 후회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장례를 준비하십시오. 살 수 없습니다. 절망을 선언할 때면 가장 무서운 외로움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내가 왜 의사가 되었을까? 그러나 무서운 수술을 앞에 두고서도 살아납니다. 반드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을 선포할 때면 의사가 되기를 잘했노라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주께서 아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전하라. 이 뼈들에게 명령하라. 선포하라. 순종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벽제 공동묘지나 용미리 공동묘지 가운데 서서 무덤문아 열려라. 뼈들아 전부 일어나라. 죽은자들 몽땅 일어나라. 주님 앞으로 찾아 나오라. 외치고 서있다면 마을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혀를 찰 겝니다. 멀쩡한 사람 맛이 가버렸다구. 류목사, 전도전도 복음전도 구도자전도 하더니 맛이 갔다고 아마 혀를 찰 겝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순종했습니다.

주께서 마른 뼈를 향하여 외치라 말씀하니 외치지요. 말씀을 전하지요. 
생기야 사방에서 불어와 이 뼈들을 살려 내라. 이곳 저곳에서 뼈들이 살아나 무서운 군대가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창조의 종교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서 온 세상을 만들어 주신 분이 여러분의 아버지 우리 하나님 되십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죽은 자를 살려내는 종교입니다. 마른 뼈에 생기를 불어 살려내는 종교입니다. 창조가 없는 종교 부활이 없는 종교는 부도 수표입니다.

오늘 에스겔의 외침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크리스챤의 절규입니다. 모든 사람이 절망할 때 우리는 소망을 선포합니다. “마른 뼈에도 소망이 있다고!” 세상 모든 사람이 울고 있을 때 성령 안에서 환한 웃음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캄캄한 인생의 밤을 헤매는 사람들에게 말씀의 등불을 밝혀줍니다.

“여기 길이 있다고!”주님 앞으로 돌아오면 희망이 있다고. 말씀을 들으면 당신이 살아날 수 있고 당신의 가정이 살고 성령 안으로 돌아오면 이 교회가 살고 이 민족이 살아날 수 있다구.  
“마른 뼈에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 앞으로 돌아오십시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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