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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약 백성의 결혼 생활 (말 2: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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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 백성의 결혼 생활 (말 2:10-16) 

말라기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430여 년 전에 기록된 마지막 예언서입니다. 말라기 시대의 문제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여 특별한 언약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택하여 구원하셨다는 진리를 굉장히 싫어합니다. 택함을 받은 것이 무엇이 대단한 것이냐며 자신의 자유의지로 믿은 것이라 말합니다. 이것이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두 가지가 오염되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오염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때는 점 없고 흠 없는 제물을 드리라고 했지만 좋은 것들은 자기들이 취하고 병들고 온전치 못한 제물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런 제물들은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지 않으시니 백성들이 죄사함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죄사함을 못 받으니 백성들이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오염에서 오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가정생활이 붕괴되었습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우리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말 2:10). 

이 구절은 종종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사용하던 말씀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시고, 모든 사람은 형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한 아버지인 하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형제처럼 살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얼핏 들으면 매력적인 이론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아버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요 8:44). 

그러므로 말라기 2장 10절의 말씀은 온 인류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모든 백성이 복을 받게 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언약대로 아브라함을 통해 예수님께서 오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이방이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백성이란 구약 시대의 아브라함 후손뿐만이 아니라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을 받은 성도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백성들의 가정생활이 붕괴된 것입니다. 

Ⅰ. 언약의 백성들이 가정생활에서 행한 두 가지 궤사 

말라기는 언약의 백성들이 가정생활에서 두 가지 궤사를 행하였다고 고발합니다. 궤사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에서 네 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말 2:10). 

“유다는 궤사를 행하였고” (말 2:11).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말 2:15).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말 2:16). 

그리고 한 번은 궤사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지만 뜻이 동일한 단어가 나옵니다.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말 2:11). 

궤사라는 말은 영어로 ‘treacherous’인데 ‘믿을 수 없다’ 혹은 ‘배반을 잘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궤사를 행했다고 할 때는 그 사람이 믿을 수 없는 사람이고, 배반을 잘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정에서 두 가지 궤사를 행했는데 첫째,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신의 딸들과 결혼했습니다.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말 2:11). 

모세는 율법을 가르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대로 이방신의 딸들과 결혼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신 7:3). 

언약의 백성들은 이방신의 딸들과 혼인을 하지 말라고 율법으로 철저하게 금지하였습니다. 단순히 이방인과 혼인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이라고 해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기생 라합, 모압 여인 룻 등은 신앙인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도 올라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방신의 딸, 즉 우상숭배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이 언약의 가정에 들어오게 되면 반드시 참된 신앙을 타락시키게 되어 있고, 참된 신앙이 타락하면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이 징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숭배자들과 혼인하여 징벌을 받게 되었다는 기록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계속해서 나옵니다. 

노아시대에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홍수를 내리신 이유가 창세기 6장 2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창 6:2). 

어떤 사람은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해석하고 사람의 딸들을 사람으로 해석하여 천사와 사람이 결혼해서 괴물 네피림을 낳았고 이로 인해 홍수가 났다는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천사가 장가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취했다는 것은 언약의 백성들이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과 결혼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가인과 아벨을 낳았는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가인은 시기심 때문에 아벨을 죽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줄이 끊어지지 않고 아담에게 다시 셋을 주셨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 4:26). 

셋의 자녀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6장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여자들의 외모에 이끌려 결혼함으로써 인류 대재앙인 홍수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은 지혜로운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나이가 들면서 아주 어리석은 왕이 되었습니다. “왕은 후비가 칠백 인이요 빈장이 삼백 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상 11:3~4). 

솔로몬은 아내가 700명이고 첩이 30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젊은 처첩들이 이방신들을 들여왔고 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다른 신들을 쫓게 만들었습니다. 솔로몬이 결혼을 잘못하여 결국 이스라엘 왕국은 남북으로 나뉘어 계속 전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에스라와 느헤미야 선지자가 힘겹게 싸웠던 것은 바로 유다 백성들이 이방신들의 딸들과 결혼하는 문제였습니다. 

“내가 책망하고 저주하며 두어 사람을 때리고 그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로 저희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하고” (느 13:25). 

느헤미야가 이방신의 딸들과 결혼시키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머리를 뽑고 때렸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 후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시킨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얼마나 강력하게 대처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에도 이것은 매우 큰 문제였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후 6:14). 아름다운 남녀 한 쌍이 연애를 했습니다. 그런데 총각은 그리스도인이었고 처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미모에 이끌려 석 달은 즐거울 것입니다. 하지만 석 달이 지나고 나면 영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겠느냐는 것은 성령과 악령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냐는 말입니다. 

이것은 가상의 예화인데 기차역에서 두 남녀가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차가 연착되어 두 남녀가 오랫동안 대화를 하게 되었고 정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확신한 나머지 기차역에서 역장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기차가 도착했는데 남자는 상행선을 타야 했고 여자는 하행선을 타야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송대관의 차표 한 장이 참 심오한 노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평생 부부로 살다가 죽을 때는 차표 한 장만 받는데 남편은 천국행, 아내는 지옥행이면 어떻겠습니까? 평생 함께 살았는데 그렇게 갈라지게 되면 과연 행복하겠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은 서로 받는 차표가 각각 다른 가정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조강지처를 버리고 이혼하는 일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혼이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신자와 불신자가 있는데 불신자가 신자를 버린다면 신자는 그런 것에 구속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고전 7:15). 

불신자가 신자를 버렸을 때 신자는 그런 일로 정죄당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신자가 신자와 살고 싶어 한다면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와 신자가 사는 경우 신자가 신자를 버리는 일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조강지처인 신자를 버리고 불신자를 외모에 이끌려 재혼을 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말 2:16). 

조강지처를 학대하고 버리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있어서는 안 되는 궤사입니다. 


Ⅱ. 두 가지 궤사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말라기 시대에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행하시는 궤사에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모독감을 느끼셨습니다. 

“유다는 궤사를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말 2:11).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성결을 욕되게 했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면 킹제임스 성경을 보면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거룩함을 욕되게 했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결국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성결을 욕되게 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거룩함을 사랑하시는데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에서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장자권을 받았는데 이것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렸습니다. 이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의 축복을 모독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모독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한 언약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지만 이것을 하찮게 취급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신자와 불신자가 결혼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구원의 축복을 하찮게 취급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들의 헌물과 기도를 받지 않으십니다.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말 2:13). 

눈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버림받은 아내들이 여호와의 단에 와서 눈물로 “아버지, 내가 버림받았으니 나를 버린 저 남편을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나게 해주십시오.”라고 눈물로 기도하게 된다는 해석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아내를 버린 남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기 위해 여호와의 단에 와서 눈물로 “여호와여 축복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자들의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마누라를 버리고 이방신의 딸을 아내로 취하여 나를 모독했으면서도 내 재단에 와서 눈물로 기도하느냐?” 아무리 울면서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고 헌물을 드려도 받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게 된 것입니다. 남자들은 잘 들으셔야 합니다. 아내를 학대하고 버린 뒤 이방신의 딸을 미모에 이끌려 재혼하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은 신약성경에서도 나옵니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7). 

아내를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은 사람으로 알아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도가 막힌다는 것입니다. 마누라를 학대하고 때리는 사람들은 아무리 기도하려고 해도 막히는 것입니다. 


Ⅲ. 택한 백성들의 가정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두 가지 

결혼을 남자와 여자만의 관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혼은 양자관계가 아닌 삼자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찍이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말 2:14). 

남편과 아내가 결혼할 때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에 결혼은 삼자관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증인이 되셔서 성도의 가정생활을 통해 두 가지를 원하십니다. 

첫째, 결혼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돌보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를 원하십니다. 남편과 아내는 짝입니다. 짝이라는 것은 세 가지 ‘C’가 필요합니다. Commitment(헌신), Communion(교제), Caring(돌봄)입니다. 서로 헌신하여 교제하고 돌보는 것이 Companion(짝)인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가정을 위해서 밥도 정성껏 하고 집안을 편안한 곳으로 만드시고, 남편은 나가서 부지런히 일하고 집에 와서는 청소도 도와주면서 아내와 가정을 돌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가정을 통해 건강한 삶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가정을 통해 축복을 주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결혼생활을 통해 ‘경건한 자손’을 얻기 원하십니다.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말 2:15).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여자를 천명도 더 만드실 수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하와 한 사람을 주셔서 아담과 살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정을 이룰 때 경건한 자손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가정을 통해 경건한 자손을 얻기 원하십니다. 물론 불신자의 자손들 가운데서도 신자들이 나오기는 합니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성도의 가정에서 성도가 나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복음을 듣고 경건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들은 신앙인으로 성장할 확률이 그만큼 높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의 가정을 통해 건강과 복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의 가정을 통해 경건한 자손들을 얻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결혼의 목적인 것입니다. 


결론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은 불신자와 결혼을 꿈도 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부모들도 자녀들이 불신자와 결혼한다고 말하면 절대로 양보하지 마십시오. 만약 그 사람과 꼭 결혼해야겠다고 한다면 교회로 데려와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침례를 받도록 권해야 합니다. 절대로 우리의 자녀들이 불신자와 결혼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혼을 이미 하신 분들은 이혼을 생각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혼이라는 말의 ‘이’자도 꺼내지 마십시오. 참된 신앙인과 경건한 가정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방언, 통변, 예언을 잘하고 은사가 많아도 가정이 건강치 않으면 그 사람은 신령한 사람이 아닙니다. 신령한 사람은 건강한 가정을 이루고 자손들을 경건한 자손으로 양육하는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과 건강한 가정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가정이 건강해야 교회가 건강해지고 교회가 건강해야 우리 사회도 건강해집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언약의 백성들이 건강한 가정을 이루어 살기를 원하십니다. 가정이 행복해지고 자녀들 모두 경건하게 자라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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