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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로운 사람의 인격적 특징 (전 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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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사람의 인격적 특징 (전 7:1-10)
  

다시 전도서에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전도서를 공부하면서 강한 부정의 표현 속에는 강한 긍정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여러 번 확인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2-3)라는 부정의 표현 속에는 ‘인생은 허무하니 살지 말자!’ 라는 부정의 의미보다는 ‘인생은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다.’라는 강한 긍정의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전 7장에도 인생을 지혜롭게만 살 수 있다면 정말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것일까요? 
지혜자 솔로몬은 조목조목 지혜로운 삶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지혜자 솔로몬이 제시한 지혜로운 사람의 인격적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지혜로운 사람은 이름을 소중히 여깁니다.

1절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라는 구절에서, 좋은 이름이란 명예욕에 사로잡혀 이름을 높이려고 하고, 이름을 널리 알리려고 하는 욕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자기 이름을 귀하게 여기고, 자기 이름만 들어도 많은 사람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게 하는 좋은 평가를 받고 사는 이름을 말합니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이스라엘 사람에게 기름은 재산입니다. 
기름은 곧 재물이요 부요의 상징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좋은 평가를 받고 사는 것은 많은 재물을 모으고, 부를 축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라는 말씀입니다. 

이름이 중요합니다.
현대인은 이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brand power!라고 하지요! 
세계1위의 브랜드 파워는 코카콜라입니다. 
삼성은 세계 25위의 브랜드 파워를 가졌는데 약 320억불 정도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나이키 같은 운동화 회사는 미국 내 생산 시설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이키 제품은 전부 동남아 지역에서 만드는데 오직 나이키란 이름 하나만 가지고 장사를 합니다. 
이름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1절 하반절에 보면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라는 말씀이 있는데 한 가정에 새 생명이 탄생하면 얼마나 기쁘고 즐겁습니까? 
그런데 인생을 훌륭하게 살아서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더 기쁘고, 더 영광스럽고, 더 자랑스럽고, 더 귀하게 여겨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이름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몇 년 전 우리는 두 가지 죽음을 봤습니다. 
하나는 영국 왕세자비 다이애나의 죽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인도 캘거타의 성녀 마더 테레사의 죽음이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였지만 그 두 죽음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다이애나비의 장례식은 화려하긴 했지만 존경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영국이 옛 대영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듯 다이애나비의 죽음을 이용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화려함과 장엄함 뒤에 쓸쓸함과 허전함이 묻어나왔습니다. 
그러나 마더 테레사의 장례식은 소박했지만 존경스러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류를 사랑했던 큰 별이 졌다고 애도했습니다. 
인생을 훌륭하게 살아서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더 기쁘고 더 영광스럽고 더 자랑스럽고 더 귀하게 여겨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2. 지혜로운 사람은 삶의 마지막을 생각합니다.

2절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또 4절에 보면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사람은 거의 본능적으로 잔칫집에 가고 싶어 합니다. 
초상집은 관심을 가지고 애쓰지 않으면 가게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잔칫집에 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사람은 웃고 즐기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잔치는 기본적으로 사람에게 환상과 망각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까? 
그것은 흥겨운 노래를 부르고 산해진미를 먹으면서 인생의 의미를 깨닫거나 발견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즐기다보면 정상적인 사람도 멍청해집니다. 
그러나 초상집에 가면 누구나 인생의 의미를 묻게 됩니다. 
삶에 대한 자각이 생기고 자기 자신의 삶을 점검하게 됩니다. 

‘나도 언젠가는 죽을 텐데…….’ 
‘이렇게 끝날 인생이라면…….’ 
‘이 죽음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저는 목사로서 장례식에 자주가고, 여러 가지 주검을 만나게 됩니다. 
이름조차 갖지 못한 갓난아기가 죽는 경우, 재롱둥이가 죽는 경우, 혈기왕성한 젊은이가 죽는 경우, 한창 책임감을 가지고 일할 장년이 죽는 경우, 연세가 높은 어른이 죽는 경우…….시신을 땅에 묻고 하관예배를 드리면서 선언을 합니다. 

‘흙은 흙으로 돌아가고 티끌은 티끌로 돌아갈지어다.’ 
이렇게 선언할 때 느끼는 바가 참 많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삶의 엄숙함을 자각하게 됩니다. 
죽은 후의 심판이 엄중하게 다가옴을 느껴집니다. 
‘남은 세월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도 하게 됩니다.

히 9:27절을 보십시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영원히 살 것처럼 희희낙락하지 말고 삶의 마지막이 있음을 알고, 그때에 그리운 님을 만나듯이 주님을 만나 뵙고, “주님, 얼마나 뵙고 싶었는데요.......”하면서 주님을 만나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지혜로운 사람은 슬픔을 압니다. 

3절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6절에서도 “우매한 자들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아주 멋있는 표현인데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를 들어보셨어요? 
산골에서 자란 분들은 아시겠지만 가시나무가 탁탁 소리를 내면서 타기 시작하면 금방 타버리고 형체가 사라집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파안대소하고 있지만 인생을 살다보면 그 소리가 언제 잦아들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고대문화에서 슬픔과 웃음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보면 재미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 문화에서는 고난과 슬픔을 경멸합니다.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고난과 슬픔을 인생살이에서 아주 가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동양종교(특히 불교의 경우)에서는 고난과 슬픔을 벗어나라(해탈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고난과 슬픔을 내 인생을 정금처럼 단련시키는 용광로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슬픔은 우리를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는 하나님의 변장된 축복이라는 사실을! 
벧전 1:7절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왜 슬픔이 웃음보다 낫습니까? 
슬픔은 웃음보다 진실하기 때문입니다. 
웃음도 감정의 표현이긴 하지만 웃음은 가식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웃음 앞에는 형용사가 붙어요. 

가식적인 웃음, 위선적인 웃음, 경멸하는 웃음, 조롱하는 웃음 등…….
그런데 눈물은 가식적일 수 없습니다. 
눈물 속에는 진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식에 능수능란했습니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불의의 사고로 죽었습니다. 
그가 아들의 죽음 앞에서 통곡했습니다. 
이제까지 그를 본 모습 중에서 가장 진실한 모습이었습니다. 
눈물 속에는 진실이 있습니다.

이집트의 와디 나트륜이란 지역에 ‘마카리우스 수도원’이란 수도원이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사역할 때 가끔씩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50년 동안 수도한 70세가 넘은 수도원 부원장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수도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입니까?” 
“네, 그것은 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죄입니다.” 
참 감동적이지 않나요? 

생각해보십시오. 
그 정도 됐으면 체면 때문이라도 그런 얘기를 못했을 텐데……. 
진실하기에 자기 내면을 드러냈습니다. 
그 진실이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우리 개신교에서 가장 존경받았던 고 한경직 목사님, 다 아시리라 믿습니다. 
70세에 은퇴를 하시고 남한산성에 있는 사가에서 머무르실 때였습니다. 
몇몇 젊은 목사님들이 은퇴하신 노목사님을 뵈러갔습니다. 
대화중에 한경직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70이 넘으면 이런 것은 없어질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내 마음 속에는 애욕이 있어.” 
그 애욕이 어떤 욕망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사실을 털어 놓는다는 것은 진실한 것이 아닙니까? 
되지도 않았으면서도 거룩한 척, 깨끗한 척, 옳은 척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만인의 존경을 받는 어른이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줄 아는 진실이 오히려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눈물은 진실하기에 지혜로운 사람은 슬픔을 압니다.

4. 지혜로운 사람은 참을 줄 압니다.

8절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9절에서도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몇 년 전 기독신문에 인상적인 기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박스 기사로 ‘한국 제일 큰 교회 문 닫다.’는 제목이 붙은 기사였습니다. 
이 기사 제목을 보고 깜짝 놀라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교회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인데 국민일보 때문에 시끄럽더니 결국 문을 닫는가 보다.’ 하고 유심히 내용을 봤더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어떤 동네의 개척교회 이름이 ‘한국 제일 큰 교회’였습니다. 
1년쯤 개척하다가 교인이 안 모이자 문을 닫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웃기는 얘기지요! 
이름을 ‘한국 제일 큰 교회’라고 붙이고 개척했다면 평생을 투자할 생각을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고작 1년하고 집어치워요? 
가치 있는 것치고 쉽게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쉽게 되는 일은 결코 가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도자기를 보더라도 쉽게 되는 것은 아낙네들이 이고 다니는 물동이 밖에 없습니다. 
굽고 또 굽고 어렵게 구워낸 것이 양반집 안방에 놓일 도자기가 되는 것입니다.

왜 참지 못합니까?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자살이 유행병처럼 번져나가고 있는데…….
한국에선 하루에 40명이 자살합니다. 
OECD 국가 중에 자살율이 1위입니다.

왜 죽으려고 하는 줄 아세요?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업이 망해서 죽는다면 살아있는 사업가는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진학에 실패해서 죽는다면 우리나라 청소년들 반은 죽어야 할 것입니다. 
카드 빚 때문에 죽는다면 직장인 1/3은 죽어야 할 것입니다. 
빚 때문에 죽는다면 전체 국민 1/3은 죽어야 할 것입니다. 
망해서 죽는 게 아니라 절망하면 죽습니다. 
희망이 없으면 죽습니다. 

왜 희망이 없습니까? 
사탄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상황을 과장하고 감정을 극도로 격화시킵니다. 
사탄은 아무것도 아닌 상황을 숨도 못 쉬도록 과장하고 죽는 것 밖에는 길이 없는 것처럼 감정을 격화시킵니다.
어떻게 하면 희망을 갖게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내 마음의 중심에 모시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후 1:19).
항상 ‘예’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혜로운 삶이되시길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것일까요? 
자기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삶의 마지막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슬픔의 의미를 새길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참을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어떻게 하면 좋은 이름이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면 됩니다! 
그래서 전도서 7장이 가리키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엡 5:1절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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