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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구원받은 확신으로 사는 사람들 (롬 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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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은 확신으로 사는 사람들 (롬 5:6-11)
   
오늘 10월 마지막 주일, 종교개혁 495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면죄부에 대한 95개 조문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城)의 예배당 정문에 붙인 날을 기념하여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에, 개인적인 편지와 함께 면죄부를 비판하는 95개 논제를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와 비텐베르크 소속 교구인 브란덴부르크 주교인 히에로니무스 슐체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날 면죄부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토론해보자고 95개 조문의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 예배당 정문에 내어붙였습니다. 

일찍이 5세기 서방의 위대한 교부인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은 ‘행위구원론’을 제창한 펠라기우스(Pelagius)와의 논쟁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의 공로나 행위로 구원 얻을 능력이 없음’을 설파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전적으로 부패한 본성을 가진 죄인은 새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과 은혜로 구원받은 수 있음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가브리엘 비엘, 윌리암 오캄으로 이어지는 중세 후기의 신학은 어거스틴의 구원론에서 벗어나고 ‘공로주의 신학’을 제창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적인 은총의 구원론을 무시되었고, ‘인간은 예수를 믿음과 함께 선을 행하여 공덕을 쌓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신학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은총과 자비 대신에 인간의 선행과 공로를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 대신에 인간의 능력과 자유의지를 강조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덕을 쌓기 위하여 성상을 숭배하거나 성인들의 유물을 찾아다녔고, 어떤 이들은 공덕을 쌓기 위하여 금욕적인 행위에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양심의 가책을 없애기 위하여 세속을 떠나 수도원 같은 곳에서 금욕적으로 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베드로대성당을 건축하게 위하여 재정을 충당하는데, 교회는 면죄부를 판매하게 되었고, 이것을 사들이면 큰 공로가 인정되어 연옥에 들어가지 않고,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독일에서 면죄부를 판매하는 권한을 가진 마인츠대주교인 알브레히트는 이 면죄부를 그동안 면죄부 판매에 경험이 많은 도미닉 수도사 요한 텟젤((Johann Tetzel)에게 맡겼습니다. 텟젤은 독일 전역을 돌아다니며 면죄부의 효능을 설명하고 다녔습니다. 살아 있는 자에게는 그가 지은 모든 죄, 연옥 형벌을 면할 수 없는 모든 죄까지도 다 사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연옥에 가 있는 영혼들에게는 살아 있는 사람이 그들을 대신하여 면죄부를 사주기만 하면 죽은 자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면죄부를 사기 위하여 연보 궤에 돈을 넣는 ‘쩔그렁’하는 소리와 함께 연옥에 있던 성도들이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물을 쏟아내듯이 유창한 말로 외치는데, 사람들은 가슴이 미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위하여, 그의 돌아가신 부모 형제 친척들을 위하여 무슨 짓이라도 해서 그 면죄부를 사지 않고는 배겨낼 수가 없습니다. 

루터는 95개 조문의 토론의제를 붙이면서 면죄부의 효용가치와 신학적인 배경에 대하여 토론하고자 하였습니다. 면죄부 발행에 대하여 오래전부터 좋지 않게 여기던 루터는 이런 것이 교회의 금전적인 타락을 가져오게 되고, 면죄부를 발행하는 것은 잘못된 신학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밝히려고 했습니다. 

36번,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면죄부가 없더라도 죄와 형벌에서 사함 받을 수 있는 완전한 권리를 가진다.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산 자나 죽은 자나 간에 그리스도와 교회의 축복에 참여한다. 이것은 면죄부가 없더라도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하신 바다.”라고 하였습니다. 

루터는 면죄부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짓는 죄에 대하여 교회는 형벌해야하고, 또 사람이 죄를 진정으로 뉘우칠 때에는 해벌한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루터가 보는 견해는 진정한 회개도 없는데, 성자들의 공덕에 위한 면죄부를 가지고는 구원 얻을 권리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고, 아무리 교황이라도 연옥에 가 있는 사람을 면죄부 한 장으로 빼내어 천국에 들여보낼 권리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약 로마서 강의를 준비하던 중에 로마서1:17절의 말씀을 가지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구원의 대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원이란 어떤 선행이나 자기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를 대속하시고, 구속해주신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하나님의 의가 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신학적으로 고민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우리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알아야겠습니다. 범죄 타락한 죄인을 반드시 벌하고야 마는 공의의 하나님과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피조물인 죄인을 용서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다른 두 가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분신이신 아들 그리스도를 죄인을 대신하여 심판에 내어주시면서 세상 모든 사람을 형벌하시고 그 아들 안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죄가 없으신 아들을 우리 죄인들을 대신하여 정죄하시고, 저주의 십자가에 달리게 하는 심판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공의와, 아들을 내어주시면서 그 아들 안에서 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적이고 무한하신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아들의 대속이 나의 죄 때문이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사랑과 희생이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그 믿음이 하나님의 의가 되어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하셨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란 도덕적인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같은 말이지만, 로마 천주교인들은 율법적인 행위로 인하여 의를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의를 믿음으로 고백하고 받아들이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의롭다는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어떤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죄악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죄악이 무서운 능력을 가지고 우리를 괴롭히지만, 우리에게는 아들을 아까워하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엡2:8-9에서 이러한 사실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그 의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우리 주님이 우리의 의가 되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고,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하였습니다.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최고의 복된 소식이며, 인류를 구원하시는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구원이요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하는데, 온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우리도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살아나실 때에 우리도 새 사람으로 살아났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의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나의 공로가 있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 앞에 아들로 세워주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격과 성품과 행실이 정말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놓여 있습니다. 사랑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옥에 버려질 자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저는 세상에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붙잡아 훈련시키면서 대중가수로 , K팝가수로 성공시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연예 기획사에서 장차 성공할만한 사람을 선발하여 발성을 시키고 매너를 잡아주고, 춤을 가르치고 한 사람을 깎아서 만들어냅니다. 

미스코리아 선발할 때마다 진선미에 선발된 여자들이 무슨 미용실 원장님께 감사한다는 말을 합니다. 저들이 여기 나와서 무슨 말을 하는가 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후보자를 선정하여 투자하는 금액이 약 6천만에서 1억 정도라고 합니다. 후보자들을 선발해서 오랫동안 먹이고, 재우고, 피부 마사지 해주고, 교양을 가르치고, 화장시키고 머리손질 해주는데, 엄청난 금액이 들어갑니다. 여러 부분에서 전문가들을 동원해서 한 사람을 미스 코리아로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에게 투자하겠습니까?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투자합니다. 가능성 없는 사람에게는 결코 투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투자방식은 세상의 방법과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면 포기해 버리지만, 우리 하나님은 다릅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인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무 조건도 없이 우리를 위해 가장 귀하신 아들 예수님을 아낌없이 내어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을 초월합니다. 어떤 형편에 있든지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남부에 있는 프레스노라는 도시에 베노스텔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노인이었지만, 하나님께 순종하고 말씀 중심으로 살려고 힘쓰는 부부였습니다. 어느 날 병원으로부터 긴급한 헌혈요청이 있었습니다. 베노스텔 부인의 혈액형이 특수 혈액 RH 마이너스 형으로 병원에서 긴급하게 그 혈액이 있어야 살릴 수 있는 환자가 왔다고 연락이 온 것입니다. 그들 부부는 병원으로 달려갔고, 부인이 수술실에서 헌혈하는 동안 남편은 수술실 밖에 있는 의자에 앉아 부인이 헌혈을 다 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간호사가 지나가기에 그 간호사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그 환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갑자기 교통사고라도 난 것입니까?” 그랬더니 간호사는 빈정거리는 말투로, “자동차 사고가 아니예요. 자기 어머니 생일에 자녀들이 집에 모였는데, 어머니 앞에서 형제들끼리 칼부림하고 싸우다가 저렇게 다쳐 다 죽게 되었어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을 베노스텔을 정말 불쾌하고 분노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 없가 없었습니다. “저런 집승 같은 놈을 위하여 아내의 귀중한 피를 뽑아주다니 그것도 어머니 생일날 어머니 앞에서 칼부림이나 하는 못된 놈을 위하여 피를 뽑아주다니” 

그는 벌떡 일어나서 아내에게 달려가서 중지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너의 모든 죄가 씻음 받았을 때 너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었느냐”라고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베노스텔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큰 깨우침을 받았습니다. 

롬5:8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처럼 그는 아무런 자격이 없고, 더러운 죄인,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한 자를 위하여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구원받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 청년의 생명을 건져주옵소서. 그리고 주님의 보혈로 그의 죄를 다 씻으시고, 그의 영혼도 구원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였습니까? 우리는 연약하였습니다. 6절의 말씀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연약하였고, 경건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약하였기에 악을 대항하는데 무력하였고, 선을 행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나무라지 않고, 아들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홀로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사53:6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고, 정죄받아야 하는 죄인이었습니다. 아직 죄인이었습니다. 여전히 죄인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죄인이라고 하면 악하게 행하는 자, 무자비하게 행하는 자, 교만한 자, 범죄자를 말합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었습니다. 조금 덜 악한 죄인, 조금더 강력한 죄인, 말로 다할 수 없는 죄인, 조금 괜찮다고 볼 수 있는 죄인, 그러나 다 죄인이었습니다. 

10절 말씀에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원수라고 여길 정도로 죄인이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구원받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고후13:5에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하면 살아갈 자신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건강하고, 사람답게 살고 그래도 살아갈만한 세상이라고 생각되어야 자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고 난 후에 아무런 확신도 없다. 내세가 어디 있느냐, 사후의 세계에 어떠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실 것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대한 평가를 내리시고, 우리의 행한 대로 심판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책임적인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질적으로 범죄 타락하였습니다. 그래서 정녕 죽으리라는 선고를 받아놓은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남은 생애를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구원받은 감격과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종교개혁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나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이 살아가시던 그 경건한 모습을 닮아가야 합니다. 자기를 내려놓고, 자기를 비우고, 내 안에 우리 주님이 살아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겠습니다. 

엡4:13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엡4:15에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하고, 그 분 주님에게까지 자라가야겠습니다. 


다시 종교개혁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주의라는 질병에 걸려 공룡이 스스로 자멸하는 것처럼 거대한 교회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영적 각성과 개혁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반성과 자기 성찰은 없고, 성직자는 평신도를 비평하고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평신도들은 성직자들의 탓이라고 비평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성경의 권위가 추락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만고의 진리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참고도서 정도로만 여기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선포하지 않고,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귀만 즐겁게 하려는 설교도 개혁되어야 합니다. 이신칭의,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칭함을 받는 교리는 거룩한 삶과 분리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행함이 칭의의 조건은 아니지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어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도 성령충만한 신앙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어떤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과 사명도 개혁되어야할 대상입니다. 교회는 예배당 건물이 아니며, 믿은 이들의 공동체요, 주님의 몸이라는 점을 알아야겠습니다. 

주님의 몸을 파괴하고 아프게 하면서 자기만 알아달라고 하는 신앙은 정말 개혁되어야 할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교회 안에서만 선포되고, 예배당 밖에서는 전혀 선포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배는 주일 예배만이 아니라, 예배 그 이후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믿음의 법으로 구원받았음을 감사하면서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요, 빛이어야 하고 소금이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이르고 성장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제2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야 합니다. 칭의는 거룩한 삶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면서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만이 아니라, 나도 또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신앙으로 주님 앞에 서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홍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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