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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막힘이 없는 축복의 삶을 위하여 (시 1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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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힘이 없는 축복의 삶을 위하여 (시 133:1-3)

오늘은 좀 슬픈 이야기로부터 말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비가 내리던 지난 5일 새벽 5시쯤 서울 서초구 방배동 먹자골목에서 44세 된 김 모 씨가 숨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발견 당시에 김 씨는 하늘을 바라보는 자세로 반듯이 누워 있었다고 합니다. 경찰은 지문조회 끝에 그의 아버지를 찾아냈습니다. 밝혀진 사정은 정말 딱했습니다. 김 씨는 열네 살 때 가정불화와 부모의 이혼을 비관하여 가출했습니다. 

그 후 삼십 년을 불쌍하게 살았습니다. 죽기 일 주일 전 그는 올해 74세인 아버지의 전화를 알아내어 <십 만원만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도 어렵다고 하면서 거절했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김 씨는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이 죽었습니다. 경찰에서 연락을 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시신을 인수하는 것마저 거부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정이 없으니 알아서 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가정이 해체될 때의 비극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런 가슴 아픈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잭 캘리>라는 기자가 소말리아에 있을 때, 곳곳에 굶어죽은 시신들 틈에서 한 작은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소년은 온몸이 벌레에 물려 있었고, 영양실조로 배가 불룩했습니다. 마침 일행 중 한 사람이 과일 하나를 갖고 있다가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너무 허약해서 그것을 들 힘이 없었습니다. 

기자는 반으로 잘라 주었습니다. 소년은 그것을 받아들고 마을로 들어가 죽은 것처럼 보이는 한 작은 아이 앞에 가 앉았습니다. 아이의 눈은 완전히 감겨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소년의 동생이었습니다. 소년은 과일을 한 입 베어 씹더니 동생의 입을 벌리고 넣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동생의 턱을 잡고 먹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기자 일행은 그 소년이 동생을 위해 벌써 보름 동안이나 그렇게 해 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소년은 결국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동생은 형의 돌봄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가뭄과 기근으로 가정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사랑으로 연결된 곳에서는 슬픔을 이기는 기쁨이, 절망을 이기는 소망이, 죽음을 이기는 생명이 일어납니다. 

이 세상에서 관계가 끊어지고, 공동체가 분열되고 해체되는 것처럼 가슴 아픈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 분열과 해체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읽은 시편은 너무도 귀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1절을 보세요.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깨지고 끊어지는 관계들, 그 속에서 고통 받는 인생들에게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를 지은 분은 이스라엘의 다윗 왕입니다. 다윗은 어떤 상황에서 이 시를 지었을까요? 베들레헴의 목동이던 그는 어느 날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였던 사무엘을 통해 장차 왕이 될 사람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그 날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되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그는 블레셋의 골리앗을 물리치는 공을 세우게 됩니다. 그 공으로 이스라엘의 첫 왕인 사울의 부하 장군이 되었고, 나중에는 왕의 사위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다윗의 인기가 점점 치솟게 되자 사울은 다윗을 경계하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다윗은 여러 해 동안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도피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가 도망하는 도중에 사울 왕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에게 손대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의로서 사울을 대했습니다. 

그러던 중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다윗에게 왕이 될 기회가 왔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하루 아침에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아닙니다. 사울이 죽은 후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추대했고, 다윗에게로 온 사람들은 그가 속했던 유다 지파뿐이었습니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만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 30세였습니다. 

이렇게 되니 이스라엘은 이스보셋의 나라와 다윗의 나라로 나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에게도 큰 고통이 되었습니다. 그 후 이스보셋의 나라는 점점 쇠락했고, 다윗의 나라는 점점 강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스보셋이 부하에게 암살당한 후 모든 민심이 다윗에게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는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만의 왕이 된 지 7년 6개월 만에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된 다윗에게 시급한 과제는 7년 6개월 동안 갈라져 있던 백성의 찢긴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습니다. 모두 함께 사랑하면서 지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다윗은 여부스 사람들이 살던 산성을 점령하여 다윗성이라고 이름하고, 그 곳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이곳이 다름 아닌 예루살렘입니다. 얼마 후 그는 방치되어 있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윗 성 안에 잘 준비된 곳으로 모셔 올리게 되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성물이었습니다. 

언약궤를 다윗성에 모시던 날 다윗은 온 이스라엘을 함께 모았습니다. 그들 모두 하나가 되어 이 기쁜 일을 축하했습니다. 사무엘하 6장 15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여기 중요한 구절은 <온 이스라엘 족속이>란 부분입니다. 그들 모두는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셨습니다. 찢어지고 갈라졌던 마음이 하나로 연합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갈라져 다툴 필요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소중한 이들과 사랑으로 연결되어 행복한 삶을 살고 계시는지요?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끊어진 관계 때문에 너무도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수많은 가정들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가 원수가 되어 이혼합니다. 그 와중에 자녀들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형제자매들도 부모님을 모시는 문제, 유산 문제 등으로 사이가 나빠져 담을 쌓고 남처럼 살기도 합니다. 

학교는 또 어떻습니까? 이젠 스승님과 제자 사이의 사랑의 관계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듭니다. 스승은 제자를 사랑 없이 초달하고,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오히려 폭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어느 버스 안에서 사람들이 다투게 되었는데,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는 승객이 뭐라고 말했을까요? <여기가 교회인 줄 알아?>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미 많은 교단들이 분열되어 대립하고 있으며, 다투어 갈라지는 교회들도 많습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또 우리에게는 민족 분단이라는 치명적 아픔까지도 있습니다. 남과 북이 갈등하고 대립하면서 군비경쟁에 열을 올려야 하는 딱한 상황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본문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삶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끊어진 마음들이 다시 연결되시길 바랍니다. 갈라졌던 이들이 서로를 향해 다가서고, 미워하던 이들이 서로 사랑하며, 상대방을 젖히려 하던 그 미움도 버리고,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 되고 연합하여 함께 동거하는 모습>의 원조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안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세 위격이 있습니다. 유명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 사이에 사랑의 연합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종교개혁자로서 우리 개혁교회의 토대를 놓은 칼빈 선생님도 삼위일체 안에 사랑의 연합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요단강에서 올라오실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요한복음 3장 17절을 보면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또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셔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고, 그 기도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또 성령님은 성부 아버지의 영이시면서 동시에 성자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그리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안에 사랑의 연합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하나로 연결되어 살아갈 때 주어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막힘이 없는 축복>입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기름은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를 세울 때 사용되었습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님으로서 이스라엘 최초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가 제사장이 될 때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름이 그의 머리로부터 얼굴을 타고 흘러 수염을 적시고, 그 기름은 옷깃까지 적시면서 흘러내렸습니다. 이 모습은 하나님의 인정하심, 하나님의 축복이 막힘이 없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언제나 안타까운 것은 통로가 막히는 것입니다. 목양실에는 순간온수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겨울 어느 날 아무리 해도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찬 물에 씻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위쪽에 열고 닫는 손잡이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잠겨 있어서 더운 물이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을 열고나니 얼마든지 더운 물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기름은 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하기도 하고, 때로는 성령님의 임재를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통로를 막아놓은 것입니다. 저는 이 예배에 참석한 모든 분들에게 이 축복의 기름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여러분 인생의 작은 일로부터 큰일까지 흘러내리길 기원합니다. 그 일을 위해 막힌 것을 뚫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축복이 흐르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것이 없어야 합니다. 

이사야 59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아멘. 

여러분,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이르지 못하는 이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죄악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암 덩어리와 같습니다. 암 덩어리가 있는데, 아무리 소화제와 진통제를 먹은들 무슨 치료가 되겠습니까? 결코 근본 치료는 될 수 없습니다. 그 근본 문제를 치료하기까지는 그 어떤 약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죄를 해결하십시오. 그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지 못하게 치워야 합니다. 죄를 치우는 방법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붓는 것입니다. 주님께로 나오십시오. 그러려니 하고 방치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죄가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씻김을 받아야 합니다. 가진 죄를 모두 회개하십시오. 깨끗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이르고 응답을 받고, 축복을 받게 되길 원합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연합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와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막힌 것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께 잘 해도, 주변 사람들과 막힌 관계에서 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마태복음 5장 23-24절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만 잘 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다른 이들에게 잘 하셔야 합니다. 불편한 관계로 계속 지나면 기도가 막힙니다.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사랑의 은사가 임하길 원합니다. 불편한 사람 있으면 가서 사과의 손을 내미십시오. 그리고 밥이라도 같이 잡수십시오. <그 동안 미안했어요.>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상대방은 그 손을 웃으면서 잡아주십시오. 이렇게 살 때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흐를 것입니다. 

우리 주변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고 혼자 앉아 외롭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떤 거지가 큰 부자인 랍비의 집 대문 기둥에 등을 비벼 긁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목격한 부자 랍비는 그를 불쌍히 여겨 데려다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히고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이튿날, 이 이야기를 들은 거지부부가 어제의 그 거지처럼 부자 랍비의 집 대문 기둥에 등을 비비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보게 된 랍비는 그들을 잡아들여 때리고 쫓아냈습니다. 거지부부가 쫓겨나면서 불공평하다고 불평하자 랍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제 그 거지는 혼자였다. 그래서 기둥에 비벼서 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너희는 둘인데, 왜 서로 긁어주지 않느냐?> 

여러분,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에 축복이 막힘없이 흐르도록 하기 위해 부부끼리 먼저 그렇게 하십시오. <여보, 등 긁어 줄게요!>라고 하십시오. 가렵지 않더라도 긁어달라고 하십시오. 긁어준다고 하는데도, <별 스럽게....저리 가!> 이렇게 밀쳐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혼자 독불장군이 되지도 마시길 바랍니다. 한 자그마한 교회에 어떤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성도들을 위해서 온갖 희생을 다하며 목회를 했습니다. 바쁜 성도들을 대신해서 예배당 청소를 하고, 차량운행을 하고, 구역예배 인도며, 사모님과 함께 주일 식사 준비까지 손수 다 하셨습니다. 심지어 주보 복사, 찬양대의 악보편집까지 목사님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교회유지가 안 될 정도였습니다. 목회자가 그 정도 헌신적이면 교회가 무럭무럭 커져야 정상 아닙니까? 그런데 반대로 성도들은 하나 둘 교회를 떠나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할 일이 없으니까요. 우리 교회는 모두가 다 참여하여 함께 할 수 있길 원합니다. 서로 손을 잡고, 서로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해 나가시길 기원합니다. 

이렇게 하면 축복이 3절처럼 임할 것입니다. 3절 보실까요?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아멘. 헐몬은 북쪽에 있는 2,700여 미터의 산입니다. 그 곳에서 시온의 산들까지는 차로 여러 시간 달려야 할 거리입니다. 그러나 막힘이 없이 형제가 동거하면 그 축복이 넓게 퍼져 내릴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온 세계가 복을 받듯이, 우리교회를 통해 전역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길 원합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통해 직장 전체에, 가문 전체에 복이 임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 복은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영원한 생명의 복은 천국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곳은 천국임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렇게 사는 가정이 천국이요, 그런 교회가 천국입니다. 장차 우리가 갈 천국이 그러한 곳입니다.  잠시 후에 부를 찬양은 너무도 사랑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만남을 계획해 놓으셨네 우린 하나 되어 
어디든 가리라 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리라 당신과 함께 
우리는 하나 되어 함께 걷네 하늘 아버지 사랑 안에서 
우리는 기다리며 기도하네 우리의 삶에 사랑 넘치도록> 

우리 모두 이런 삶을 살면서 천국의 기쁨을 누리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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