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추수감사절] 여호와께 감사하라 (시 136:1-9)

첨부 1


여호와께 감사하라 (시 136:1-9)

어느 교회학교의 아이 이야기입니다. 교회 갈 때마다 엄마에게 헌금을 받아 가지고 갑니다. 그날따라 엄마가 500원짜리 동전 두 개를 주면서 ‘하나는 하나님께 헌금해야 된다. 그리고 예배 잘 드리고 돌아오다가 아이스크림 하나 사먹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아이는 얼마나 신이 났는지 양 손에 동전을 들고 깡충깡충 뛰어 갑니다. 하수구 옆을 지나가다 동전이 하나 떨어져 떼구르 굴러 하수구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하는 이야기, “앗, 하나님의 돈이 하수구에 빠졌네.” 왜 하필 하나님의 돈이 하수구에 빠졌을까요? 내 것은 언제나 내 안에 있는데, 이 철부지처럼 언제나 하나님의 것이 시궁창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어떤 성도가 열심히 기도를 해도 자기에게 특별한 응답이 없어서 몹시 실망하고 있던 어느 날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천사의 손에 이끌려서 하늘 보화창고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한 창고에 도착했습니다. 창고가 텅텅 비어있었습니다. 

“이 창고는 어떤 창고입니까?” 물었더니 “간구 창고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이것 주십시오. 저것 주십시오. 간구하고 기도할 때마다 이 보화 창고를 열고 다 나누어 주었더니 빈 창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 더 큰 창고가 있었는데 보화가 하늘 천정까지 가득히 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창고는 무슨 창고입니까?”, “감사 창고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고 작은 은혜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크게 나누어 주려고 쌓아 두었던 보물창고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하도 감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보물이 쌓여져 있습니다.” 깜짝 놀란 이 성도는 성전에 엎드려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헤아려 보기 시작했습니다. 일마다 때마다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느껴가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감사했습니다. 하늘 보화가, 신령한 은혜가 넘치게 되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감사에는 참 신비가 있습니다. 감사할수록 더 커지는 신비 말입니다. 은혜 받기 원하십니까? 축복을 원하십니까? 가정에 보화가 쌓이길 원하십니까?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 시편 136편은 150편의 시편 가운데 대표적인 감사의 찬양입니다. 시편의 후반부에는 두 가지의 노래가 있습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와 “여호와께 감사하라”입니다. 이 두 가지는 시편의 주제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인 오늘 우리는 감사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편기자는 계속해서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왜 감사해야 할까요? 

특별히 오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이라면 감사가 나오기 어려운 상황과 조건 가운데 있을 텐데 그래도 감사해야 한다면 왜 감사해야 할까요? 3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은, 

1. 우리를 온전케 하실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2절)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 
(3절) “주들 중에 뛰어난 주님”, 
(4절)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 
(5절)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
(6절) “땅을 물 위에 펴신 이”, 
(7~9절) “빛과 해와 달과 별들을 지으시고 날을 주관하시는 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136편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설명하는 표현을 써서 ‘ ~ 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의 수식어들로서 그 내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9절까지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10~22절까지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인도하신 하나님’, 
23절 이후로는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해 표현을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초월자이십니다. 우리 인간의 세계를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못하실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지으시고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는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주의 계획을 마침내 내게 관계된 모든 것을 내 삶에서 성취하시고 완성하시고야 말 것을 나는 믿습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면 오늘 내가 비록 환난 가운데 있더라도, 오늘 나에게 풀리지 않는 일들이 있을지라도, 나의 형편과 처지가 어렵더라도 나는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단어 중에 ‘환란’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의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뜻이 비슷합니다. 그 의미가 본래 ‘틀 속에다가 집어넣고 짠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어떤 것을 틀 속에 집어넣고 짜면 뭔가가 만들어져서 나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너 고생 좀 해봐라’하고 그냥 내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온전케 하실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2. 우리의 인생 자체가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136:10~20을 보면, 시인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사건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 하나님’,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신 하나님’,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하나님’,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이 사건은 옛날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사건들을 감사하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사건의 주인공으로 ‘나’를 대입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대신에 ‘나’를 대입시키면, 나를 건지시고,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기까지 ‘나’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할렐루야! 

사도 바울은 3번씩 주님 앞에 나와서 육체의 가시를 옮겨주기를 기도했습니다. 바울에게 어떤 병이 있었습니까? 어떤 사람은 아마도 다메섹 도상에서 강렬한 주님의 빛을 경험했을 때 안질에 걸렸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바울에게 아마도 간질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병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도저히 옮겨지기 어려운 불치의 어떤 어려움의 환경이 바울에게 직면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을 세 번씩 간절히 구했지만 그 환경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고 그대로 바울을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기도 응답을 못 받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좋은 방법으로 주께서 자기의 기도를 응답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를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아마 바울이 건강하기까지 했더라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정리했습니다. ‘나를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래서 그 질병과 아픔 때문에, 아마도 그 고통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 상황을 버티고 견딜 수가 있었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내게 이미 족한 것입니다. 내가 약할 때 그분은 내게 강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 가운데 어려움이 와도 우리의 인생 자체가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3. 궁극적인 축복과 승리에 대한 확신 때문에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1절) “땅을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 
(25절) “먹을 것을 주신 하나님”, 

기업과 먹을 것을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 볼 수 있는 것, 걸을 수 있는 것, 말할 수 있는 것이 다 감사의 조건입니다. 그리고 또 뭐라고 고백합니까?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136편 1절에서 26절까지 26번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추수감사절은 구약과 신약 그리고 교회시대의 공통된 절기, 최고의 절기입니다. 그러나 세계가 11월에 감사주일로 지키게 된 것은,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에게서 유래합니다. - 청교도들은 미국으로 건너간 첫해에 곡식을 거둬들여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날이 시초가 되어서 지금의 감사절이 된 것입니다. 

1620년 12월 26일 미국 동북부 플리머스(Plymouth)에 상륙한 102명의 청교도는 상륙 즉시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비록 180톤밖에 안 되는 작은 배이지만 그들은 배를 주신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 배의 속력은 평균시속 2마일 이어서 어떤 때에는 걷는 것보다 느렸습니다. 

그러나 117일간을 항해하여 무사히 약속의 땅 아메리카에 도착한 것을 감사했습니다. 항해 중에 여러 사람이 죽었지만 몇 명의 아기가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큰 돛까지 부러질 정도의 풍랑을 만났으나 파선되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고, 여자 몇이 물결에 휩쓸려서 실종되었으나 구출된 것에 감사하고, 원주민의 방해로 한 달 여 항구를 배회했으나 마침내 호의를 얻어 무사히 상륙한 것을 감사하고, 삼개월반 동안의 고통스런 항해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원망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을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항해에 원망이 없어야 합니다. 세상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오히려 큰 감사의 힘을 내어볼 때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감사를 배워야 할 때입니다. 우리에게 인생의 마지막 추수의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 마지막 추수의 날에 감사로 마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궁극적인 축복과 승리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동영상, 『감사 속의 비전 윌리엄 캄쾀바』, 

캄쾀바라는 청년이 문화적, 환경적 여건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감사한 마음과 함께 비전을 품어 성공한 이야기.... 

어떤 학자들이 밀림 속의 아직 미개한 곳에 가서 원주민들을 살펴보니 그들의 말을 다 번역할 수 있었는데 “감사하다”라는 말을 전해줄 단어는 그들에게 없더랍니다. 감사를 모르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생활이 미개하면 할수록, 문화가 미개하면 할수록, 생활이 육적, 영적으로 어렵고 어두울수록, 감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동,서독이 통일된 후 그곳을 방문한 어떤 분의 얘기입니다. 구공산권 땅에 가보니 모두가 가난하고, 얼굴엔 기쁨이 없고, 모두 거짓말을 잘하고, 그들 언어에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행복합니다. 사랑합니다.’ 란 말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세계 여행을 하고 돌아온 우리나라의 어떤 사람은 세계 무수한 사람들을 만났고 세계 무수한 언어들을 만났지만, 그 나라에 가서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실례합니다)', 이 두 단어만 있으면 여행이 피곤하지 않더라고 말했습니다. 

강철왕 카네기는 말하기를 “배은망덕은 들풀과 같아서 가만히 두어도 자라나지만 감사는 장미와 같아서 계속 길러야 자라난다”고 말했습니다. - 불평불만은 가만히 두어도 자라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아무교육이 없어도 저절로 살아나고 돋아납니다. 그래서 자주 뽑아야 됩니다. 그러나 감사는 가만히 두면 자라나지 않습니다. 장미와 같이 자꾸 물을 주어야 감사의 꽃이 피어납니다. 

인도 격언에 “신께서 호랑이를 왜 만들었는가 불평하지 말고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않은 것을 감사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어느 것이 진짜 신앙이냐? 여러분에게 감사의 열매가 얼마나 풍성하냐? 여러분의 감사의 표현이 얼마나 진실하냐?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 뜻 깊은 감사주일에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진실한 감사를 드리므로, 더 큰 감사의 조건들을 체험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