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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하자 (시 50: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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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하자 (시 50:22-23)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 개인의 삶과 가정, 그리고 우리 교회에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와 영광을 올립니다. 이 시간 지금까지 은혜로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의 박수를 올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앞뒤 좌우 성도님들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인사 하겠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감사’라는 말을 참 많이 사용합니다. “감사”란 지난날 받은 은혜에 대하여 고마워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하여 고마워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은혜를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문제는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감사하지 않는 죄”라고 했습니다. 마땅히 감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않는 것은 무지해서 감사를 깨닫지 못하거나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 그리고 배신이나 죽음으로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그리고 성경을 읽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막힌 귀로, 또한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도록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라는 말로 감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인 모세는 신 6:11-12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힘든 광야생활을 마치고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백성들의 생활이 넉넉해지고 평안해질 때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여호와를 잊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잘 섬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원해 주셔서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생활 가운데 40년 동안이나 기적과 역사로 인도하시고 지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다 잊어 버렸습니다. 하나님보다는 가나안의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세상의 쾌락에 심취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감사를 잃어버리고 살지는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잊어버린 감사나 약해진 감사생활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22절 전반절에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감사회복, 혹은 감사생활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감사’라는 영어단어와 ‘생각’이라는 영어단어는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감사 할 줄도 알고, 감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인생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매순간을 이끌어 주시기 때문에 인생이 사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한 순간이라도 우릴 놓으시거나, 버리시면 우린 살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간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과거 하나님이 너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한 번 생각해 보아라. 그러면 왜 하나님께 감사를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를 온전히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느 날 임금님이 시골 마을을 지나다가 한 목동의 집에서 묵게 되었는데 목동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욕심이 없고, 성실하고, 평화로운 것이 평소의 신하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습니다. 젊은 목동의 모습에 끌린 임금님은 목동을 나라의 재상으로 등용했습니다. 능력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재상이 된 목동은 성실하게 사심 없이 일을 잘 처리해 나갔습니다. 그러자 다른 신하들이 그를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일개 목동이 재상이 된 것도 그러하거니와 적당히 뇌물도 받았으면 좋겠는데, 모든 일을 공정하고 깨끗하게 처리하니 자신들의 처지가 곤란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이 재상이 된 목동을 쫓아내기 위해 모함거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재상은 가끔씩 자기가 살던 시골집에 다녀오는 것이었습니다. 몰래 따라가 보니 광에 커다란 항아리가 있는데, 항아리 뚜껑을 열고 한참동안 항아리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신하들은 재상이 청렴한 척하면서 몰래 항아리 속에 금은보화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임금에게 일러 바쳤습니다. 

화가 난 임금님이 재상을 앞세우고 신하들과 함께 재상의 집을 찾아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광 속에 있는 항아리를 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항아리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은 금은보화가 아니라 재상이 목동 시절에 입었던 낡은 옷과 지팡이뿐이었습니다. 

임금님이 사연을 묻자 재상이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본래 목동이었습니다. 임금님 은혜로 재상이 되었지만, 제가 목동이었다는 걸 잊지 않기 위해 가끔씩 집에 와서 목동시절에 입었던 옷을 보고 있습니다.' 그 뒤로는 아무도 재상을 헐뜯는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인 다윗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향한 진실을 잊어버릴까봐 자신의 영혼에게 다짐 또 다짐하였습니다. 시 103:1-2절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도록, 그 진실된 감사가 상실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의 삶, 감사의 신앙을 회복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감사할 것이 없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까? 정말로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는 분이 계실까요? 그렇게 말씀 하시는 분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감사할 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감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감사할 것이 없는 것이지 감사하려고 하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복된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안식할 수 있는 가정과 사랑하는 자녀가 있어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일할 직장, 공부할 학교가 있어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믿고 구원 얻어 하나님 자녀가 된 것이 무엇보다도 감사하고, 이 세상 모든 것 다 잃는다고 해도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이게 뭐 그렇게 감사할 일이냐?”라고 말할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을 이미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모릅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모릅니다. 건강을 잃은 사람에게는 건강하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모릅니다. 가정이 없는 사람에게는 가정이 있다는 것이 얼마가 감사할 일이지 모릅니다. 자녀가 없는 사람에게는 자녀가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부모가 없는 사람에게는 부모가 있다는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직장이 없는 사람은 직장이 있다는 것이, 학교 다니지 않는 사람은 학교 간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이지 모릅니다. 그리고 지옥 간 사람은 천국에 간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모릅니다. 

헬렌 켈러를 아실 것입니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3중고의 장애를 가지고 살았으나 항상 감사함으로 비장애인을 부끄럽게 한 사람입니다. 헬렌 켈러가 점자로 써서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단 한번만 저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 볼 수 있었으면, 

내가 단 한번만 떨어지는 저 낙엽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 볼 수 있었으면, 

내가 단 한번만 저 깊은 산 속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시냇물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내가 단 한번만 저 아름다운 가르침과 자상한 친절을 베풀어주시는 우리 선생님 샐리반 선생의 아름다운 그 미소를 바라볼 수만 있었으면, 

내가 한번만 저 오케스트라의 연주하는 장엄한 그 음악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내가 단 한번만 나에게 그 귀한 감동을 주시는 필립스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수만 있었으면, 

내가 한 번만 그 말씀으로 내 삶을 바꾸어 놓았던 그 감동스런 성경말씀의 내용을 직접 내 눈으로 보고 읽을 수 있었으면, 

내가 한번만 지는 해의 그 아름다운 석양의 노을을 직접 내 눈으로 바라 볼 수만 있었으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 그럴 수만 있으면 지금 당장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헬렌 켈러의 이 소망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평범한 것이기에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평범한 것들이 이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감사의 조건이 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보다 많은 것, 나은 것, 좋은 것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아래를 보고 비교하기 보다는 높은 것을 보고 비교하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자신보다 조금만 낮은 것을 보아도 쉽게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욕심만 조금 내려놓아도 감사할 수 있고, 조금만 낮은 곳을 보아도 입술에 감사의 열매가 맺힐 수 있습니다.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는 자신의 간증을 통해 “은혜에 익숙한 것이 가장 무서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야코는 중병에 걸렸을 때 한 청년을 만나 전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과 결혼을 했습니다. 병든 자신과 결혼을 해 준 남편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몇 년을 같이 살다보니 갈수록 고마운 마음이 식어지고 그저 그랬습니다. 남편의 사랑이 당연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신경질도 내고, 미워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은혜에 익숙한 것이 가장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은혜, 죄 가운데 나를 구원하신 은혜에 너무나 익숙하여 감사를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찬송을 불러도 기쁨이 없으며, 기도를 해도 감격이 없는 신앙은 아닙니까? 만족보다는 더 많은 것을 바라며 불평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의 타성에 젖어 감격을 상실한 채 밋밋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이 은혜에 익숙한 나머지 감사를 놓치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열 명의 문둥병환자를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멀리서 예수를 알아보고 크게 소리치며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제사장에 가다가 도중에서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하나 사마리아 사람이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마리아인에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았는데 아홉은 어디 있느냐, 한 사람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물으시며 이렇게 구원의 축복을 선언하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여러분, 아홉 명의 사람과 사마리아 한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아홉 사람에게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으니까 예수님께 나아와 부르짖고, 긍휼을 구하고, 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제사장들에게 자기들의 몸을 보이기 위해서 나아갔던 것입니다. 병 나음을 입을 수 있었다는 것은 이들의 믿음이 작은 믿음이 아니라 큰 믿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을 칭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들에게 “주시옵소서.”의 믿음은 있었지만 “감사합니다.”의 믿음은 없었습니다. 즉 받는 믿음만 있었지 드리는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칭찬하신 믿음이 무엇입니까? “감사합니다.”의 믿음입니다. 받는 믿음보다 드리는 믿음을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더욱더 성숙해지기를 바랍니다. “주시옵소서.”의 믿음에 머물러 있지 말고 “감사합니다.”의 믿음을 소유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받는 믿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드리는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 학살 현장인 아우슈비츠 감옥에 세워진 기념비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감옥보다 더 무서운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인류가 그 사실을 잊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잊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사 49:14-15절에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에 인색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2012년 올 한해도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살아왔습니다. 뒤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모릅니다. 생활에서 감사의 제목을 늘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감사하십시오. 생각할수록 감사의 제목은 늘어가고, 감사의 제목이 늘어갈수록 삶은 더욱 풍성해지고 행복해 질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복을 받아 누리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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