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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끝이 아름다운 요셉 (창 50: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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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아름다운 요셉 (창 50:22-26)

오늘로 4년 여에 걸친 창세기 강해설교를 마감합니다. 종종 우리는 역사 속에서 아름답게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일본인에게 존경을 받는 혼다 자동차의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라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손으로 대 기업을 이룬 그는 66세에 "내가 사장자리에 계속 있다면 회사의 성장이 둔화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그는 아들 등 직계 가족의 혼다자동차 입사는 막아놓고, 기술자 후배에게 사장자리를 넘겨주고 떠났습니다. 

깅리치 전 미하원 의장도 "내가 하원에 남아 있으면 새로운 지도자가 성장하고 배울 기회를 얻는 것이 어려워진다"라는 말을 남기도 고향으로 떠났습니다.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특히 인생에서는 마지막 매듭을 어떻게 짓느냐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끝을 맺느냐는 중요합니다. 어떻게 끝을 맺는 것이 아름다운 인생이겠습니까? 

110년 동안 이 땅에 살다간 요셉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몇 지 교훈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을 책임져 가족에게 인정받는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요셉은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을 책임지며 돌보았습니다. 그는 어릴 때 가족으로부터 배척받은 사람입니다. 그것도 비참하게 형제들에게 인신매매되어 애굽에 팔려온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힘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명예도 얻고 권력도, 부도 얻었습니다. 얼마든지 가족에게 복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을 돌봅니다. 

(1) 원수같은 형의 아들들을 돌봅니다(21). 

(2) 이방 여인과 결혼하여 낳은 손자까지 돌봅니다(23).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고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이 양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방 첩의 아들입니다. 대상 7:14절을 보십시오. 

"므낫세의 아들들 그 처의 소생은 아스리엘이요 그 첩 아람 여인의 소생은 길르앗의 아비 마길이니 (대상 7:14)"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은 이방 여인 그것도 첩의 아들까지 자애롭게 돌보아 주었다는 것입니다. 

(3)그는 끝까지 경건한 가정을 가졌습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의 아들들입니다. 요셉은 권력도 있는 사람입니다. 돈도 있습니다. 명예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첩을 거느릴 수 있는 문화입니다. 그러나 그는 깨끗한 가정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야곱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많은 어머니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입니다. 그는 철저히 가정을 정결하게 지켰습니다.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이 나되 곧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 낳은지라 (창 41:50)" 

이 말씀이 오늘 날 우리에게 주시고자하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참으로 아름다운 끝은 가족을 책임지며 가까운 가족에게 인정받는 죽음입니다. 

요셉은 출세를 하였습니다. 80년 동안을 총리로 있었습니다. 명예도 얻었습니다. 부도 얻었습니다. 많은 백성에게 유익함도 주었습니다. 그런데 가정에 그가 실패하였다면 그의 죽음을 결코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가정에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은퇴를 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을 하여도 가정에서 실패하면 그것은 참다운 성공이 아닙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우지 못했다하더라도 가정에서 성공한 사람이 참으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흠이 무엇입니까? 하갈을 얻어 이스마엘을 낳은 것입니다. 가정의 실패입니다. 그의 사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인류는 그것으로 지금까지 종교전쟁, 민족전쟁을 치르고 있지 않습니까? 야곱의 실수가 무엇입니까? 다윗의 실수가 무엇입니까? 솔로몬의 실수가 무엇입니까? 가정의 실패입니다. 그것으로 가족이 분열되고 나라가 분열됩니다. 마지막 순간 가족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잠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하나님 나라에 간 후 아이들이 아버지의 생을 돌이켜 보며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가정에 실패한 아버지다라고 말한다면 저의 삶은 아름다운 삶이 아닐 것입니다. 

부부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 홀아비 과부가 되어 있습니다. 그 시기와 기간을 모르지만 같이 살다가 홀로 살 때가 옵니다. 그 때 남편은, 아내는 나의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얼마 전 영락 교회 모 장로님의 장례를 치른 어느 목사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6.25 때 월남하여 열심히 사업을 하여 큰 기업을 이루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여 초대 장로로 열심히 수고하여 큰 교회도 만들었습니다. 참으로 진실하고 겸손한 분이었습니다. 얼마 전 장로님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천국에 갔습니다. 장례식에서 손녀가 나와 추모사를 읽었습니다. 

"할아버지, 우리는 할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진실과 겸손과 바르게 사는 길의 표본이 되어 주시고 말없이 실천해 주신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로 모신 것을 저는 행복하게 생각하고…… 할아버지, 우리가 할아버지 같은 신랑 얻게 해 달라고 소원했던 것을 아시지요" 

우리가 죽은 후 할아버지와 같은, 아빠같은 삶을 나도 살아야겠다고 하는 자식들이, 손자 손녀들이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끝이겠습니까? 


2.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인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미래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24절을 보면 이제 죽음을 앞둔 요셉은 그 형제들에게 유언적인 말을 합니다. 30세에 국무총리가(창41:46) 되어 80년 동안 부귀영화와 권세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의 유언적인 고백은 무엇입니까?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권고하시고, 인도하여,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라는 말입니다. "나는 죽으나"라는 말입니다. 인생의 한계와 유한성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권고하시고... 인도하여...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미래를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신앙 고백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일에 있어서 우리가 최선을 다 하되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살아있는 동안 아버지에게 형제들에게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제 그의 나이 110살입니다. 조상들에 비하면 한참 일할 나이입니다. 지금으로 보면 장수한 것이지만 그 당시 조상들의 나이에 비교하면 중년입니다. 아브라함 175세(창24:7,8), 이삭 180세(35:28,29), 아버지 야곱이 147세(47:28; 49:33)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 비하면 110세는 아주 젊은 나이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인간들의 병중 하나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자신이 모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주제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섭리하신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부터 시작한 창세기는 마지막 족장 요셉의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인간은 끝이 나지만 하나님은 계속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여호수아를 세워놓고 아름답게 하나님의 나라에 갔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보십시오. 시작은 참으로 좋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자신이 나라를 붙들려고 합니다. 이미 하나님은 다윗을 통하여 메시야적 예언을 해주려고 하시는데 자신이 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인천대 총장인 김학준 교수가 언젠가 신문에 '국민이 슬퍼하는 죽음'이라는 사설을 쓴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지도자의 죽음을 다섯 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 

첫째 스탈린처럼 지도자가 죽으면 국민이 기뻐하는 죽음이 있고 

둘째 케네디나 처칠, 드골처럼 국민이 슬퍼하는 죽음입니다. 

셋째는 헝가리의 카다르 죽음처럼 기뻐하는 쪽도 슬퍼하는 쪽도 있는 죽음이 있고 

넷째 필리핀의 마르코스처럼 경멸하는 죽음이 있으며 

대부분의 지도자처럼 추도식은 가족행사로 끝나는 무관심한 죽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온 국민이 슬퍼한 죽음은 김구, 신익희, 조병옥박사의 죽음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구분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이 한 일들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때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그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분명한 사명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리사욕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이것을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세상 방법과 똑같이 합니다. 목회를 기업을 이루듯 생각하고, 사회에서 출세하듯 신앙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 의해 우리가 쓰임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주님 왜 그만 두게 합니까? 원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어진 시간 맡긴 일 충실히 하다가 영원한 나라로 가면 되는 것입니다.


3. 마지막 순간까지 약속을 붙들고 소망을 갖는 신앙인- 나와 하나님에 대하여 

요셉은 죽음의 순간에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 땅으로 자신의 시신을 안장해 놓을 것을 부탁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입니다. 애굽은 자신이 평생 산 땅이고 부귀와 영화가 보장된 땅입니다.(창41:46) 그러나 그는 그곳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언약을 철저히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은 요셉의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히 11:22)"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미래를 소망하기 때문에 현재의 죽음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고후5:1-10)

우리는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천국에 대한 소망을 확실히 갖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임종자들의 모습을 몇 가지 유형별로 분류 하였습니다. 

① “안죽어”형- 평생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는 형입니다. 

② “왜 죽어”형- 분노를 터뜨리면서 죽어가는 형입니다. 죽을 이가 없는데 왜 죽어야 하는지 억울해 하면서 죽는 사람입니다. 

③ 간청형- 죽음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자신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해 보고 애걸복걸하는 형입니다. 

④ 절망형- 죽음 앞에서 충격을 너무 받아 정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죽는 사람들입니다. 

⑤ 승리형-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부활이요 길이요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웃으며 아름답게 인생을 끝마치는 형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느 형입니까? 마지막 순간 붙들어야 할 소망이 없는 사람들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그의 끝이 얼마나 추하게 보입니까? 

1883년 3월 14일 칼 마르크스가 사망하던 날, 그의 하녀가 다가와서 "저에게 당신의 마지막 말을 남기시면, 제가 기록해 두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마르크스는 "시끄러워, 나가!"라고 소리치며 죽어갔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나는 불행했다. 프랑스, 군대, 조세핀 ...."이라며 초라하게 숨졌고 

장개석은 "영웅이란 용감하게 실패하는 자이다. 그러나 희망은 ... " 라며 대륙수복의 한을 남기며 죽었다고 합니다. 

그렇게도 자유를 부르짖던 싸르트르도 1980년 3월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서 죽음의 불안과 공포 때문에 병명도 묻지 않고 한달 동안 발악을 하며 찾아온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다가 죽어 갔습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죽음이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라는 말씀처럼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88세로 죽음에 임했을 때 "모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하며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유명한 19세기의 미국 부흥사 D.L 무디는 임종을 당하여 슬퍼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내일 아침에 무디가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정말 내가 죽은 줄로 생각지 마시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좀 더 높은 곳으로 옮겨가는 것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죽은 이의 묘비에 다음과 같은 비문을 새겼습니다. "이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라 이제야말로 새로운 생명에 들어간 것이다." 

죤 칼빈은 임종시에 "주님! 당신께서 저를 묻어 주시는군요 이것이 당신의 섭리로 된 것이기에 저는 더 할 수 없이 만족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과학자 톰슨은 임종시에 제자들이 묻기를 "선생님께서 발견하신 것 중 최대의 발견은 무엇이었습니까?"라고 하자 "나의생애에서 가장 큰 발견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김활란 박사는 세상을 떠날 때 모두 슬퍼서 장송곡을 준비하려 했는데 이 김 박사는 장송곡 대신에 승리의 행진곡을 불러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5-58).

죽음까지 우리에게는 희망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는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이 있다하여도 희망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시작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끝은 더욱 아름다워야 합니다.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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