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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여성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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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예찬
진재수목사

나는 집사람 아니었으면 총각으로 늙어 죽게 되었을까? 서른넷이 되어서야 장가를 들었다. 그리고 아이를 넷을 낳고 키우다 보니, 다 늙도록(?)까지 이것저것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다. 그토록 좋아하는 영화 한편 제대로 볼 수도 없다. 저녁이면 아이들이 얼마나 시끄럽게 떠드는지 TV 9시 뉴스도 못 본다. 그러니 언제 한가롭게 TV 드라마나 영화 한편 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번 추석 때, 아이들을 처갓집에 보내놓고, 정말 오랜만에, 아내와 단둘이, 오붓하게, TV에서 방영한 “엽기적인 그녀”라는 영화를 보았다. 그 영화를 보면서 평소 웃음이 많은 아내의 웃음보가 터져 그칠 줄을 몰랐다.

옛 사람들이 ‘후천개벽(後天開闢)’은 ‘음개벽(陰開闢)’이라더니, 정말 후천개벽의 시대가 왔나보다. 여성이 남성을 꽉 쥐고 사는 시대가 되었지 않은가? 오죽했으면 ‘맞사모(맞고 사는 남편들의 모임)’이라는 사이트까지 생겼단다. 그러나 이건 뭔가 문제가 있다. 어찌 후천개벽이 여성이 남성화되어지고, 남성이 여성화되어지는 이야기란 말인가? 이것은 분명한 오해이다. 어리석은 자의 소견에는, 오늘날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여성해방을 마치 여성이 남성화되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여성들은 ‘아놀드슈왈츠 체네거’같은 사람에게 임신을 시켜 보고 싶은 모양이다. 거기서 야릇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가 보다.

전에 이문열이라는 작가가 ‘선택’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신문연재 첫 회부터 “반페미니즘”작품으로 낙인찍혀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봐도 그 소설에서 문제점을 찾아 내지 못했다. 실존인물인 정부인 장씨의 고백으로 그려진 소설의 내용은 논리정연하다. 소설의 내용은 그녀가 뛰어난 문필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안채와 부엌을 떠나지 않는 여자의 본업을 행하였던 것은 체제에 대한 순응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그 소설에서 정부인 장씨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여자만의 문제란 없거나 지극히 적다. 여성이란 말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남성이 있어서이고 따라서 여성의 문제란 언제나 남성과 관련된 문제를 뜻한다. 그런데 상대인 남성을 적대 개념으로 다루고 방법을 투쟁만으로 일관한다면 너희 선택의 폭은 너무 좁고 비극적이 된다. 곧 이겨서 포악한 상대를 온전히 제압하거나 져서 이전보다 더 엄혹한 예속과 굴종 속에 떨어지는 길밖에 없다. 더 있다면 남녀의 철저한 결별로 인류사의 진행이 중단되는 것 정도일까?”

폭력적으로 남성에 맞서서 이겨내는 것을 여성의 승리로 보는 것은 아무래도 페미니즘의 오해인 듯 하다. 여성이 남성다워지는 것이 페미니즘일까? 여성이 여성다움을 포기하는 것이 여성해방이나 여성운동일까? 왜 여성이 여성의 아름다움을 포기하려 하는가? “엽기적인 그녀”가 흥행에 성공한 이유가 뭘까? 여주인공 전지현이 그 영화에서 엽기적(?)으로 나오지만, 그녀는 얼마나 여성적이며, 매력 있는 여인인가? 만약 그 영화의 여 주인공이 목젖이 나온 근육질의 여성이었다면 어찌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으리요. 뭇 남성의 마음을 뒤흔드는 긴 머리에 아름다운 S 곡선, 이런 전지현의 미모와 매력이 없었다면 그 영화는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여성이 여성스러운 것은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다. 여성이 여성스럽다는 것은 창조의 질서요, 오히려 이것이 장차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원리인 것이다.

음개벽(陰開闢)이란 무엇인가? 인류문명사는 지금까지 양이 지배하는 시대였다고 한다. 유럽문명이란 무엇인가? 양의 원리가 패권을 쥐고 이룩한 문명이 바로 유럽문명이 아닌가? 지금껏 역사는 ‘때리고 죽이고 탄압하고 빼앗고’하는 일들로 역사가 진행되어 왔었다. 그런데 이제 앞으로 ‘보듬고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부드럽고 섬세한 여성적인 것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진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 아닌가? 그러니까 후천개벽(음개벽)이라는 말은 여성이 남성화되어지고 남성이 여성화되어진다는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세상이 지금 뭔가 잘못되어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 맞다. 남녀는 평등하다. 하나님께서 남녀의 인격을 평등하게 지으셨다. 그러나 역할의 면에서는 남녀가 분명히 다르다. 남녀의 신체구조를 비교해 보라. 공평하신 하나님은 어찌 여성에게만 아름다운 유방을 허락하셨을꼬? 평등하지만 역할을 다르게 지으신 때문이 아닌가? 그 옛날 여성이 억압받고 살았던 때, 여성들은 교회에서만 남녀의 평등을 발견하였다. 여성들은 교회 안에서 비로소 여성의 권리와 참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여성들이 핍박을 무릅쓰고 교회를 찾았다. 그러므로 복음전파의 주역은 여성들이 아닐 수 없었다. 여성에게는 이름도 없던 시절, 여성들은 교회 안에서 자기의 이름을 불러 주는 것 만해도 기절할 정도로 좋은 일이었다. 복음은 잘못된 세상의 질서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마치 여성운동의 가장 큰 방해물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진리가 바뀐 것일까? 아니다. 세상이 너무 바뀐 것이다.

여성은 여성다움을 가져야 한다. 여성다움은 결점이 아니라 장점이다. 여성과 남성은 사뭇 다르다. 남성은 지적, 이성적, 객관적인데 여성은 감성적, 인격적이다. 남자아이는 로봇 차 같은 장난감을 좋아하지만, 여자아이는 인형을 좋아하고 인형을 통해 인격적인 세계를 열어간다. 여성은 남성에 비하여 훨씬 인격적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오랫동안 목욕탕을 다녀봤지만 목욕탕에서 만난 모르는 사람끼리 서로 등을 밀어주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아내의 말을 들어보니, 여성은 목욕탕에서 처음 보는 사람의 등을 서로 밀어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남성은 자기 생일도 잊어버리지만, 여성은 이웃집 아줌마 생일까지 기억한다. 물론 남성 속에 여성의 성향이 섞여 있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로 여성 속에 남성의 성향이 섞여 있는 경우도 있겠지. 그러나 아무튼 여성스러움은 세상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든다.

세상의 모든 여성이 남성화되어지고 말면 세상은 얼마나 각박하고 삭막하겠는가? 교회에서도 여성다움, 여성의 인격감각이 필요하다. 앞으로 그런 교회가 성장할 것이다. 가만히 보면 남성들은 복음을 머리 속으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여성은 복음을 인격적으로 직관하는 깨달음이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3년간 합숙 훈련시키며 가르치시고, 졸업시험문제를 내셨는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수제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한다. 그러나 그가 그 말의 참된 의미를 알았을까? 아니다. 그 다음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실망을 금치 못한다. 그는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말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은가?

그런데 여기 한 여성을 보라. 그녀는 주님과 결코 많은 시간을 갖지 못하였던 여인이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비했다. 그녀는 예수님이 인류대속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으로 가능했겠는가? 여성적 특유의 직관이다. 여성은 신체구조가 복음을 잘 깨닫게 되어 있다. 여성은 아이를 낳고 젖을 먹여 기름으로 생명의 신비를 체험적으로 깨닫는다. ‘아하! 생명은 희생의 죽음을 통해 얻게 되는구나’하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딤전2:15에는 여성이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한다. 해산의 경험이 복음을 직관적으로 깨닫게 한다는 말이 아닐까? 자기의 인생을 즐기기 위해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여성이 있는가? 그녀는 인생의 참 즐거움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인생의 참된 의미를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영접하는 것이지 예수님의 말씀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모시는 것이다. 나는 열심히 성경 읽고 연구하고 깨달은 것은 기쁜 마음으로 아내에게 말할 때가 있다. 그런데 아내는 그것을 벌써 다 알고 있는 것이다. 나보다 지성적이지도 못한 것 같고, 나보다 성경도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지 않고, 묵상도 적게 하는 것 같은데, 아내는 다 알고 있다. 나는 도통 그 이유를 몰랐다. 세상을 좀더 오래 살면서 성경을 읽다보니 이것이 여성의 직관력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다.

여성!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세상이 바뀌었다고 여성이 남성으로 될 필요는 없다. 천지 창조 기사를 보라. 하나님은 조잡한 것을 먼저 복잡한 것을 나중에 지으셨다. 조잡한 생물을 먼저, 복잡한 생물을 나중에 지으셨다. 여성은 남성보다 나중에 지어졌다. 그래서 여성의 신체구조는 남성보다 더 복잡한 것 같다. 신체만이 아니라 정신구조도 마찬가지이다. 아내와 부대끼며 살다보니 알 것도 같다. 여성은 아름답다. 여성은 가장 정교하게 지어진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여성은 여성스러움을 회복해야 하리라. 여성이여! 여성적 감각, 여성스러움의 회복이 하나님 나라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라. 과거 교회부흥의 주역은 여성이 아니었는가? 이것은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시대는 참으로 여성다움이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여성이여! 여성적 인격감각으로 이 시대를 치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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