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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성경은 왜 살인자 다윗을 정직하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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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왜 살인과 간음을 한 다윗을 정직하다고 하는가?

역대하 34장 1절 ~ 7절: 요시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팔세라  예루살렘에서 삼십 일년을 치리하며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길로 행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오히려 어렸을 때 곧 위에 있은지 팔년에 그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구하고 그 십이 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케 하여 그 산당과 아세라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매 무리가 왕의 앞에서 바알들의 단을 훼파하였으며 왕이 또 그 단 위에 높이 달린 태양상들을 찍고 또 아세라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거기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에 뿌리고 제사장들의 뼈를 단 위에서 불살라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케 하였으며 또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시므온과 납달리까지 사면 황폐한 성읍들에도 그렇게 행하여 단들을 훼파하며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며 온 이스라엘 땅에 있는 모든 태양상을 찍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우리 인간은 척도관이 옳아야 하는데 만일 그 척도관이 비뚤어지면 잘못되기 쉽습니다.  바른 척도(기준)가 무엇인가 하니 정직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면서부터 이 척도가 비뚤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척도로 살아야 할 인간이 하나님의 척도가 아닌 다른 척도로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곧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본질의 선악을 안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인간 자기 척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요시야는 바른 척도를 가졌습니다.  다윗의 정직한 길로 행했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객관적으로 도덕적인 측면으로 보면 다윗은 정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에서는 다윗이 정직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행한 일들을 보면 윤리적으로도 죄를 지었고, 도덕적으로도 죄를 지었습니다.  너무나도 잘 아는 것이지만 군인들은 전쟁에서 싸우고 있는데 자기는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서 옥상에서 남의 여자 목욕하는 거나 쳐다보고 죄를 짓고, 또 거기서 더 나아가 자기의 심복인 우리아의 아내를 가로채고, 우리아를 전쟁에 내보내 가지고 죽게 했습니다. 

죽이는 그 수법이 남 보기에는 심복을 사랑하는 척 하면서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걸 악하다고 그랬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 후에 집에서는 형제끼리 강간하는 일이 일어났고, 형제끼리 살인을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이런 것을 우리 인간 입장에서 보면 다윗을 정직하다고 보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에서는 ‘다윗의 정직한 길’ 이라고 그랬습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자들은 일반세상적 윤리 도덕적인 면에서의 개념과 척도를 가지고 성경을 보거나 그 개념과 척도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되고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정직한(바른) 삶이 어떤 것인가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알고 갈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은 일반적으로 ‘솔직하다 청렴하다’ 하는 그것보다도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하는데, 그러면 정직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목적성을 바로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 바른 것을 붙잡아야 하는 겁니다. 

만약의 경우에 추구성이 다르면 이거는 정직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행동 한 두 가지 고친다고 해서 정직이냐? 
예를 들어서 술 담배 먹던 것을 안 먹는다고 해서 그게 정직이냐?  성경은 그렇게 보는 게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정직하다, 청렴결백하다’ 하는 걸 알아주고, 그러한 사람을 향해서 ‘저 사람은 법이 없이도 살 거다’ 라고 말하지만 청렴결백하다고 하는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것을 붙잡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사는 게 아닙니다. 

신앙 면에서 ‘정직하다’ 할 때 이 ‘정’을 한자로 말하면 바를 정(正)입니다.  즉 바른 것을 붙잡는 것이 정직입니다. 

그러면 바른 게 뭐냐?  하나님을 바로 붙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직은 뭐냐?  한자로 말하면 곧을 직(直)인데 신앙적으로 나가면서 바른 것을 붙잡으면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바른 그것을 향해 그대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정직은 하나님의 목적을 갖는 것인데 기독자들이 대개 정(正)이 비뚤어졌습니다.  또한 정(正)으로는 인정을 받았지만 행위 면에서는 하나님 앞에 인정을 못 받는 면도 있습니다.  즉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시인하고 말씀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행동적으로 잘못 나가는 게 있어서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로부터 흠을 잡히기에 좋을만한 게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그런 내가 하나님을 안 믿느냐?  그건 아닌데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오점은 오점이고, 정직은 정직이라는 말인데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정직한 길로 가면서도 행위적으로는 오점은 남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남에게 욕을 할 수도 있고, 성을 낼 수도 있고, 고의적인 어떤 죄를 지을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예수님을 붙잡긴 붙잡았습니다만 바른 길로 계속 가지 못하고 넘어지고 하는 그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울을 다윗과 대조해 볼 때 사울은 다윗과 같은 그런 죄는 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반 도덕성적인 개념을 가지고 사울과 다윗을 대조시켜서 따져들어 간다면 다윗은 욕을 먹을만 합니다. 

반면에 사울은 일반적으로 보면 얼마든지 칭찬 받을만한 일을 했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후 전리품 중 좋은 것만 남겨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에 얼마나 좋으냐 그 말입니다. 
윤리와 도덕적인 면으로 볼 때 사울에게는 다윗과 같은 그런 죄는 없습니다.  사울 왕의 첩과 다윗의 첩 중 다윗의 첩이 더 많은듯 합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다윗과 같은 그런 죄는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흠이 있다고 한다면 사울 왕이 자기 왕권 빼앗길까 싶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인데, 사실 이런 비슷한 일들은 이 세상에서도 정치계에서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한 일은 정치가나 신자가 할 수 없는 도덕성적으로 보면 너무나도 악랄하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에게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 다윗처럼 그런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그 말인지?  여기서 정직이라는 정직을 명확하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 본문을 주신 것입니다. 

다윗은 그가 행위적으로는 어떤 죄를 지었던 하나님을 향한 영원성이라든지 추구성이라든지 목적성만큼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즉 우리 기독자가 먼저 가져야 할 것은 정직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일단 이것을 먼저 바로 잡고 나가면 이제 모든 것은 서서히 바로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보면 하나님의 정직을 붙잡지 못하고 일반 도덕성적인 개념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일반 도덕성적인 행위만 자꾸 고쳐 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걸 백 날 고쳤다 해도 하나님의 정직은 아닙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그걸 악하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붙잡아야 이게 바로 되는 거고, 진리지식의 신앙의 방향성으로 돼야 정직이 되는 것인데 정직이 아닌데서 백 가지 천 가지를 고쳤다고 해도 이것은 궁극적 결과적인 면에서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직이 아니라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먼저는 정(正)이요, 이것 위에 이제 직(直)을 고쳐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라는 말은 ‘세상적으로 치우쳤다, 세속적으로 치우쳤다, 신비주의로 치우쳤다’ 그런 의미보다도 아무리 세상적인 것, 혹은 종교적인 것, 즉 ‘신앙적인 게 아닌 종교적인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 해도 바른 목적성을 향해서 가는 것만큼은 변경치 않는 것이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른 목적성에서, 바른 추구성에서, 바른 지향성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이 깨달아지면 마음속에 이치가 열리는데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함’ 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성경구절을 뒤져도 하나님의 성품으로 온전케 되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생활적으로 사건 환경적으로 어떤 사건 환경을 만나더라도 자타의 구원인 이 온전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기도 역시도 이것을 위한 기도가 정확한 기도요, 하나님 앞에 바른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마치 점쟁이들이 ‘우환이 물러가게 해 달라’ 라고 하거나, 대문에 ‘입춘대길’ 이라고 써놓는 것처럼 ‘나쁜 사건은 물러가게 하고 나 좋도록 사건이 오게 해 달라, 좋은 일만 당하게 해 달라’고 하는 그런 식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사망아 오너라, 사건아 오너라, 네가 쏘는게 뭐냐’ 그러고 있습니다.  ‘그것과 싸우라’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건이 오더라도 그 사건이 오든지 가든지 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닌 주님이 알아서 할 일이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사건 환경을 나에게 보내더라도 나는 거기에 대항해서 이길 수 있는 실력만 키우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실력은 염두에 두지 않고 자꾸 좋은 환경만 달라고 하면 옳은 신앙정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신세상 사람들의 속셈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그건 정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사건 환경을 보내주는 목적을 알고 그 사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성을 내가 구한다면 그건 정직한 길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 앞에 옳은 것입니다.  그런 소원목적성으로 나가는 신앙사상과 정신에서 이탈되지 아니하도록 하는 이것이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 보면 예루살렘을 청결케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첫째는 정직히 행하고, 그 다음에 다윗의 길로 행하면서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그 다음에 다윗의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을 구하는 여기에는 하나님의 지혜지식성, 하나님의 도덕성, 하나님의 능력성을 구하는 겁니다.  성격적으로 구하고, 성질적으로 구하며 자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사건이 왔느냐?  사건을 없게 해 달라고 그러지 말고 그 사건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면서 하나님에게 지혜를 달라고 그러고, 물질적으로 좀 손해를 보더라도 신앙 면에 손해 보지 않게 나가는 것이며, 그 다음에 ‘예루살렘을 정결케 하고’ 하는 여기에는 먼저 자기의 속을 정결케 하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정직히는 행했는데 정결 면에서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게 오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물욕 색욕 식욕 탐욕 시기 질투 공명 미움 이런 등등을 제거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사람이 정결하게 되고 깨끗해집니다. 

요시야는 이렇게 해서 자기 속이 정결이 돼 나가니 바알들의 단과 우상을 부수고, 이것들을 섬기는 자들을 죽여 그런 자들의 무덤에 뿌렸습니다.  이거는 복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속에서 그런 걸 정결 시키려면 먼저 ‘내 속에 이런 우상이 있었구나, 이런 걸 내가 좋아했구나’ 하는 걸 알고, 이제는 복수심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쳐서 가루로 빻아 뿌리고 없애버리고 한 이건 복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깨끗해졌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제 옳은 것을 붙잡았으면(깨달았으면) 과거의 신앙생활에서 잘못 가르침 받고 잘못 알고 나갔던 것을 생각하면서 그걸 자기 속에서 복수를 할 줄 알아야 됩니다.  복수할 줄 모르고 자꾸 그런 추억을 생각하고 있으면 또 다시 그렇게 나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귀의 시험을 타게 되고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걸 깨닫게 하고 뽑게 하려니까 외부적 사건 환경적으로 또 몰아붙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몰아붙이면 붙이는 만큼 자기 속에서 아세라 목상과 단과 그런 우상들을 때려 부숴서 복수를 해야 하는데 그게 안 돼 나오면 그런 것들이 슬며시 내 속에 스며들어와 가지고 나는 그 정신과 손을 잡게 됩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 자들의 무덤에 뿌려야 합니다.  복수심이 있어야 됩니다.  그 면에 대해서 원수를 갚아라 그 말입니다. 

무리들이 이런 행동들이 나왔는데 이것은 마음의 움직임이 육신의 행위적으로 옮겨지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즉 마음에 가득히 담아 있었던 것이 복수심이 되어서 나오니까 행동적으로 옮겨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다윗의 이 정직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이 아니면 다윗의 정직을 알 수가 없습니다.  각오와 결심만 한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정직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먼저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하신 궁극적이며 최종적이며 목적적인 뜻을 알고, 그 뜻을 알았으면 어떤 사건 환경이 오더라도 그 뜻대로의 사람으로 만들어주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보내주셨음을 믿고 그 사건 환경에서 그 뜻을 잡고 나가면 정직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이러한 영적 정신과 사상을 찾아서 그 사상과 정신을 나의 것으로 자체화 실상화 시키지 않는다면 성경은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타 종교에서처럼 일종의 경전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한 것입니다)
궁극교회 홈페이지: http://any.to/gugg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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