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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나는 바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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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9:25-27

오늘의 천주교는 분명히 성경적으로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땅에 천주교가 처음 들어 왔을때 신앙으로 인하여 천주 교인들이 받았던 핍박과 그들이 그러한 고통을 감내했던 신앙적 자세를 살펴보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절로 숙연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특별히 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하게 되는 아픔이 이땅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한국 교회사를 살펴보게 되면 오늘 우리들이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할수있다는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은총인가를 고백하게 됩니다.

소설가 황인경씨의 소설 목민심서를 읽어보면 바로 초기 천주교인들이 핍박 받았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가지 가슴아픈 사연을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려 합니다.

8살에 사서삼경을 통달하여 장차 가문에 큰 영광을 가져다 줄것이라고 가문에
신뢰를 주었던 이벽이라는 선비가 있었습니다.
이벽이라는 사람은 다산 정약용의 형님인 정약전의 친구입니다.

양반가의 출신인 이벽이 천주교를 믿게 되자 그의 집안은 난리가 나게 됩니다.
어느날 드디어 그의 아버지로부터 더 이상 천주학을 믿으려면 부자간의 인연을
끓자고 독촉 당하게 됩니다.

아들에게 하나님을 믿지 말것을 요구하는 이러한 아버지의 요청을 수용할 수 없었던 이벽은 집을 나오게 되었고,  아버지 이 부만은 충격을 받아 사랑방 대들보에 목을 매어 달아 자살을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은 아버지의 시신앞에서 무서운 죄책감과 회한에 몸부림을
치면서 자신의 신앙에 회의를 가지게 됩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으로 이벽은 정처없이 떠돌다가 왕십리
부근의 배추밭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신앙의 불모지 같았던 조선땅에 천주교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어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전도했던 이벽,

그의 포교와 설득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고 순교의
길을 들어서게 했던 이벽,
이 이벽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저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겪었을 신앙의 갈등과
아픔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것이 얼마나 소중한것인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소중한것을 누리고 있음에도 그것의 중요성을 모르다가 고난을 통하여
과거의 누리던것이 얼마나 소중한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저희교회 고등부 아이중에 필리핀으로 유학간 아이가 있습니다.
제가 1주일에 두차례씩 아이들에게 메일을 보내고 있는데 그 아이가 제게 보낸
답장글을 소개합니다.
"안녕하셨어요. 죄송해요 빨리 답장 메일을 했어야 하는데 이제야 메일 체크를
할수 있었어요.
요즘 대학 원서 사기도 바쁘고 조금 있으면 대학 시험 보거든요.
전도사님  기도해 주세요. 걱정이 많이 되요.
유진이 답지 않죠?
항상 좋은 말씀 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너무 많이 힘이 되요. 유진이는 너무 행복한 사람인것 같아요.
자주 메일 쓸께요."

저는 이글을 읽으면서 두가지 생각을 가졌습니다.
하나는 유진이가 머나먼 타국땅에서 외롭고 힘든 생활을 해 나가면서
무척 성숙해졌음을 느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영적 지도자로서 한명의 아이에게라도 힘이 된다는 사실에
보람과 긍지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사랑의 가족여러분,여러분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중요하고 소중하신 분이십니까?
한국 교회의 신앙적 세대는 이제 제 3세대입니다.
1세대인 초기 그리스도인은 이미 찾기 어렵고, 2세대인 그리스도인들도
현역에서 물러난 분들이 거의 대다수입니다.

1세대와 2세대 신앙인들은 많은 부분에서 아브라함처럼 체험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분들에게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도움없이는 아무것도 할수없는,
에벤에셀의 은총으로 삶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분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이 흘린 땀방울과 순교의 피위에 오늘의 한국교회는 번영과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3세대인 오늘의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점점 관념적이고 추상적이 되어 가고 있는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구원자임을 우리의 입술과 머리로는 고백하지만 우리의
가슴과 손과 발로써 고백하는 것에는 갈수록 약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까요?
저는 그 이유가 진정한 신앙의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존귀하고 소중한 분인지를 바르게
인식하고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의 우선순위는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은 신앙의 가치, 즉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중요성을 생생하게 증거하는 본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께 바울이 쓴 바울 서신을 읽으실때 권하고 싶은 성경읽기의 관점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출신 배경과 그의 변화에 주목 하시면서 왜 바울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로서 최고 상류층의 삶을 살수 있었음에도 그는 무엇때문에
그렇게 고난의 길을 자초했던가를 질문하시면서 읽으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바로 본문 역시 그러한 질문을 던지면서 읽으면 해답이 나옵니다.
2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節制)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왜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렇게 고생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운동 선수들이 평소에 흘리는 땀은 실제 경기를 할때 승리를 위해서 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현재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치루고 있는 댓가들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사도바울, 그에게 있어서 과거의
명예와 자존심, 그리고 누리던 기득권을 포기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것입니다.
이러했던 바울 자신의 마음을 27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내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여기에서 우리는 쳐 복종하게 함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기전의 자신의 세속적이고도 육체적 욕구를 제어하여
그리스도를 섬기기 원하는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말입니다.

특별히 이 가운데 복종하게 함은 이라는 헬라어"둘라고고"는 종을 뜻하는
"둘로스"와 데려오다를 뜻하는 " 아고"의 합성어 입니다.
즉 당시의 전쟁에서 승자가 패자를 종으로 끌고 오는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몸을 쳐서 패배 시킨후 이제는 완전히 복종시켜 종이 되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호지라는 성서학자는 이말을 바울은 그의 육체적인 본성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죄의 성향과 욕망까지 복종 시키려 하였다라 주석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이렇께까지 철저하게 자신을 복종 시키는 것입니까?
바로 27절 하반절과 25절 하반절에 그 대답이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그 놀라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가 바로 그리스도를 얻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전파한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다'

          


여기에서 버림이 된다라는 말의 의미를 두가지로 해석하는데
1.구원을 받지 못하고 버림받는다.
2.구원에서 제외 되는것을 뜻하는것이 아니라 상급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MOrris)

이둘중 후자를 인정하는 편입니다.
즉 바울은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통해서 성도가 이땅을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것은 썩을 면류관이 아니라 썩지 않을 영원한 면류관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는 당시의 최고 상류층에 속한 뛰어난 지식인 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정체에 대해 자신이 체포 당한뒤 로마의 천부장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행22:3을 읽자.

          

"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또한 그는 당시 태어날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속된말로 꿀릴것 하나 없던 바울이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던 이유를 빌3:7-9에 말씀합니다. 읽고 마치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것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시는 부름의 상을 바울은 보았기에 오늘 여기에서 당하는 현실의 아픔과 고난, 또는 유익함에 초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위에서 부르시는 부름의 상을 볼수있는 영적인
눈이 열려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땅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준 사명 감당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달리는, 바울의 표현처럼"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는 신앙의 고백을 드릴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랑의 가족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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