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예화 낯선곳에서의 아침

첨부 1


          

창세기 12;1-4

창세기는 50장으로 되어 있지만 두 부분이 합쳐진 책입니다.
1-11 장을 원역사 또는 세속사라 합니다.
그리고 12-50장을 족장사 또는 구속사라 합니다.

세속사의 마지막 장인 11장은 하나님 없이도 살수있다라 했던 당시의 사람들,
아니 과학 문명의 발달로 야기되는 인간의 욕망으 끝이 어디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11:3-4절을 읽겠습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

          

당시의 건축 기술이 얼마나 발전 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여러분께 질문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제 삼으셨던것이 시날 평지에서 성과 탑을 쌓았던것 때문입니까?
또한 왜 하나님은 바벨탑을 쌓지 못하도록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4절에 그들이 그토록 뛰어난 기술과 건축 공학을 가지고 있었슴에도 바벨탑을 완공하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무슨말입니까?

다르게 표현하자면 교만입니다.
시날 평지에 거했던 당시의 사람들,
그렇게도 탁월한 문명을 지녔음에도 뛰어난 기술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일에 쓰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이름을 내자했던 사람들,
즉 하나님없이도 살수있다는 세속사의 절정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바벨탑 사건을 보면서, 아니 성경을 읽으면서 저와 여러분이 철저히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겸손한 자들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혹시나 여러분중에 교회일을 하시면서 바벨탑을 건축했던 이들처럼 자기 이름을 내자라는 착각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이름을 내자" 참으로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자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나님 없이도 살수 있다 했던 세속사에서 구원사를 펼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살펴봅시다.
11:26절입니다.
"데라는 칠십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즉 하나님께서는 구원사를 펼치시기 위해 하나님꼐서 직접 행동 하시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쓰실 사람을 보내신다는 말입니다.
세속사의 한 가운데, 즉 중심점에 남겨진 노아의 아들인 셈의 후손인 데라, 비록 이방 문화에 동화되어 살고 있었음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시기 위해 데라에게 아들을 주십니다.
데라에게 주신 그 아들이 바로 구속사를 펼쳐나갈 주인공인 아브람입니다.

이시간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닌 그 정든땅과 정든 사람들과 헤어져 불확실한 미지의 땅을 향해 나아갔던 아브람을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들이 취해야 할 신앙적 자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창세기 12장의 본문을 대할때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는데 바로 '낯선곳에서의 아침'입니다.

낯선곳에서의 아침,  변화경영 전문가인 구본형씨가 쓴 책이름입니다.
미지의 땅, 자신과 전혀 연관이 없는 그야말로 낯선곳에서 맞는 아침, 어떤 느낌과 감정이겠습니까?
"낯선곳에서의 아침"이라는 책 서문에 나오는 한 부분을 소개하며 본문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아직 미완의 미래를 가지고 있다. 나의 미래는 뻔한 것이 결코아니다.
내가 있고 싶은 곳으로 가서 낯선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 흥분과 긴장이 있는곳, 불안과 더불어
떠나왔다는 해방감과 자유가 있는곳, 그곳에서 나는 나와 마주하고 싶다."

저는 성경 본문을 묵상하면서 같은 낯선곳의 아침이지만 아브람이 맞이했던 아침과 이 구본형씨가 맞이했던 아침에는 질적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구요? 이 구본형씨는 내가 있고 싶은곳에 가서 낯선 아침을 맞이했지만 아브람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철저히 자신의 의지와 뜻은 배제된 곳으로 가야 하지 않습니까?
바로 12:1절입니다. 같이 읽어보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시간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서 그 엤날 아브람이 겪었을 갈등을 생각해 보면서 동시에 이 갈등이 아브람만의 갈등이 아닌 오늘 우리들의 현실속에서 있는 문제임을 말씀을 통해 생각하고자 합니다.
어느날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두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그것은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는 말과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입니다.
지금까지 땀흘려 이루어 놓은 터전을 버려두고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아브람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것도 목표 지점을 알려주고 그곳을 향해 출발해라 해도 마음이 불편할텐데 무조건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답답하고 난처 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들은 성경 66권이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라고 말하면서도 말씀은 말씀이고 내 생활은 생활이다 하면서 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누구인고 있는데 하나님이 누구인지 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도 몰랐던 시대, 더군다나 이교 문화가 지배하던 많은 신을 섬기던 시대에 어느날 나타나신 하나님이 무작정 자신이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명령에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다운 행동을 취하게 됩니다.
4절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갔던 아브람, 그런데 훗날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아브람의 행동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히11: 8-10을 찾아 봅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

          
아브라함 신앙의 특징과 모세 신앙의 특징의 차이점을 아십니까?
먼저 모세 신앙의 특징은 모세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자신들의 조상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부모들에게서 듣고
자란 사람입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모세는 하나님에 대하여 최소한의 전 이해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대표적으로 모세가 처음 소명을 받게 되는 출애굽기 3:4-6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아브라함 신앙의 특징은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알고 믿은 것이 아닌 그분의 말씀을 믿고 따랐더니 그분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창22: 12-14절을 찾아봅시다. 그 유명한 모리아산 제물 사건입니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

          
그러면 무엇이 아브람으로 하여금 하란을 떠나 낯설고 물설은 타향으로 가게 했을까요?
바로 12:2절의 하나님의 세가지 약속입니다.
1.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무슨 말입니까? 큰 민족이란 단순히 숫자적으로 인구가 많은것뿐 아니라 영적으로 위대한 민족 즉 이스라엘의 조상이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2.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으로 창대케 한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유명케하여 그 이름이 널리 알려 지게 되리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큰 아버지"라는 아브람에서 "열국의 아버지"라는 아브라함으로 바뀌게 되지 않습니까?

3.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단순히 아브라함 개인으로 그치는 복이 아닌 그의 대대로, 그의 가계에 약속된 여자의 후손인 메시야가 난다는 말입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축복의 유통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3절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는다." 얼마나 귀한 약속입니까?
바라기는 00교회에 속한 저와 여러분으로 인해 이 지역이 복받고 우리 민족이 복받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 떠나서 가야 된다 라 하셨는데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디를 떠나야 하며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떠나야 할 땅은 죄악된 세상이라 말씀합니다.
즉 세상에 동화되는 것이 아닌 세상속에 살지만 의와 거룩을 쫓는 순례자의 삶이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마치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 낯설고 물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던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태의연한 옛 습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어야 된다라 말씀합니다.
로마서 12:2절을 읽어보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그렇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 우리들이 취해야 할 삶의 태도는 이 시대의 풍조 즉 유행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떠나야 할 습관과 옛사람은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이 버려야 할 구습과 욕심은 무엇입니까?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신에게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떠나라, 가라는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바라기는 날로 악해져가는 세태속에서 이 시대에 동화되는 것이 아닌 심령의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복의 근원들이 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