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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창녀의 자식이 지도자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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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시대는 구약시대의 영적 빈곤기입니다.
지도자(사사)로 선택된 드보라, 삼손, 입다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오죽 선택할 사람이 없었으면 이런 사람들을 지도자로 일으키셨겠습니까?  
드보라는 당시 인구조사를 기록할 때 아이와 함께 기록에서 제외되는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삼손은 자신이 사랑한 이방 여인에게 농락당한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또 입다는 어떻습니까?

오늘 저는 사사기 11장 이하에 나오는 사사 입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는 오늘날로 말하면 김두한과 같은 해결사입니다. 서부영화식으로는 총잡이였고 소설처럼 말하면 홍길동과 임꺽정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창녀가 길르앗(사람 이름이자 지명이기도 함)에게 나은 서자였으므로 이복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피신한 땅이 '돕'땅입니다. 출생 환경부터가 처절합니다.
그러나 그는 돕땅에 거하면서 다행이도 의적의 보스가 됩니다. 보스라기 보다는 지도자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을 부하로 거느렸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출입하였습니다.
그의 소식이 그가 태어난 고향 땅 길르앗에게도 퍼지게 됐습니다. 이곳은 므낫세지파에 속한 땅입니다. 그런데 그곳의 장로들이 입다를 찾아갔습니다. 이유인즉 암몬의 침략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스라엘 장로들은 외세의 침략에 대한 해결책이 하나님이셨음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영적으로 어두웠습니다. 그래서 총잡이인 입다를 사러 가는 모습이 이스라엘의 현실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각각 제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이 말은 사사시대를 설명하는 속담같은 말이 되었습니다.

지도자가 없고 왕이 없고 선생이 없고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다는 것 만큼 그 공동체를 비참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여호수아 시대 이후로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고작 입다같은 사람이 사사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도 하나님을 왕으로 모셨다면 문제될 것이 없었는데 왕이신 하나님이 차지할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히브리서 11장 저자는 입다를 믿음의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그가 한 일을 보면 도무지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기엔 못마땅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는 암몬과의 싸움에서 하나님이 승리케 해 주시면 승리한 후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을 번제로 바치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무남독녀 외동딸이 걸려듭니다. 졸지에 딸을 번제로 바친 파렴치한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성경 역사상 이스라엘 사람 중 자신의 자녀를 번제로 바친 사람은 아브라함을 제외하면 없습니다.
그것(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것)은 그가 터를 잡은 '돕'땅에서 그곳(이방)의 사람들이 행하면 종교제사의식인데 그것을 모방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어쨌든 이일은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는 그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과오였던 것입니다.

그 후 시비를 걸어온 에브라임지파 사람들을 요단 나루턱에서 4만 2천명이나 죽인 그 유명한 '십볼렛 사건'도 영적 순결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명분과 자존심만 내세우는 에브라임지파를 철저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300용사를 선발할 때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군인들을 모은 숫자의 합이 3만 2천명이라는 사실을 감안해 본다면 한지파(에브라임)에서만 4만 2천명이 죽임 당하는 모습은 하나님이 무엇을 싫어 하시고 무엇을 미워하시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불신앙을 꾸짖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이방의 암몬에게 가하셨던 심판보다도 더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사로 선택된 입다의 예를 보면서 우리는 희망을 봅니다.
즉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을찌라도 눈을 하나님께로 돌릴 때 희망을 보고 꿈꾸게 되고 비전을 볼 수 있습니다.
문벌과 학벌을 따라 사람을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겸손하며 하나님의 임재앞에 추하고 더러운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미숙하지만,  결함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쓰시는 것이 아닌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입다는 적어도 마음이 가난한 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입다는 광야와 같은 그의 환경을 사람을 얻는 인간관계의 성공을 통해서 리더쉽을 발휘하는 사람이 되었고 급기야는 하나님의 작은 도구로 택함받았던 것 같습니다.

주님이 오늘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교회(목사)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욕심많은 배사장이 되었으니 내가 차라리 ccc(입다)의 하나님이 되겠다, 내가 네비게이토(입다)의 하나님이 되겠다, 차라리 뜨레스디아스(입다)의 하나님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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