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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전병욱 목사.... 깊은가슴을 가진 기다림이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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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 2일 / 바나바 2 / 행15:36-41 / 깊은가슴을 가진 기다림이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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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15:36-41 *
(행 15: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행 15: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행 15: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행 15: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행 15: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행 15: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설교 내용 속기..............《 깊은 가슴을 가진 기다림이 있는 사람 》

  깊은 가슴을 가진 기다림이 있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을 말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나바가 마가의 회복을 돕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2차 전도여행을 할 때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했더니 바울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오늘 본문 15장38절을 보니까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1차 전도여행을 할 때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마가 요한은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선교하다 보니까 조금 어려움이 있었나봅니다. 중간에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사도행전 13장13절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이때 요한은 마가 요한입니다) 사도 바울의 중간에 변질했던 사람을 데리고 가면 안 된다, 이런 자는 본때를 보여야 한다, 기준이 흔들려서 안 된다는 주장을 했고 바나바는 두 번째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면서 데리고 가자고 주장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가지고 논쟁합니다.
  바울이 옳으냐, 바나바가 옳으냐, 어떤 선택을 해야 되느냐를 가지고 논쟁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옳고그름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틀린 것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것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은 바울스타일대로 사용하시고 바나바는 바나바스타일대로 사용하십니다.
  바울도 실라와 함께 선교했을 때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임하는 사역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나바도 마가와 함께 하나님의 사역을 잘 마친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에 마가가 회복된 일들도 보게 됩니다.
  효과적인 사역의 열매를 위해서는 바울 같은 방식의 사람이 더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도 있다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세우는 면에서 본다면 바나바 같은 여유와 따뜻함이 있을 때 더 많은 회복의 은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바울과 같은 사람도 있어야 되지만 바나바와 같은 따뜻한 위로의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교회를 이루어야 교회 전체가 풍성해지고 상호보완적인 은사를 통해서 더 크게 확장될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실패한 사람을 품고, 실패한 사람을 찾아가는 영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생명을 주고 사람을 회복케 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같이 한사람 한사람의 무너졌던 것들을 세워주는 성품에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 마가의 회복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 기다림!

  다른 사람의 회복을 위해서 필요한 성품 한 가지는 ‘기다림’이라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깊은 가슴이 있는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좋은 것을 그냥 주시지 않습니다. 구약성경부터 신약성경에 넘어갈 때 하나의 원칙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항상 약속부터 주시고 오랜 기다림의 과정을 통과함을 통해서 마지막에 열매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오랜 기다림을 주시는 이유는 기다림이 있어야만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이 가슴으로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다림이 있어야만 체험 있는 신앙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많은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모두가 메말라 있습니까? 왜 굳어진 가슴이 되었습니까? 패스트푸드 시대의 영성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은 흐르는데 표면만 흘러 버립니다. 물이 흡수되어야 생명이 자라나는데 표피만 적시고 가버리는 영성이기 때문에, 기다림의 깊이가 없기 때문에 가슴이 굳어졌습니다. 깊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밥을 할 때 밥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뜸을 들여야 됩니다, 뜸이 뭔지 아시지요? 평소에 저같이 밥을 안 해 본 사람은 등산 가서 밥이 되었나 안되었나 솥뚜껑을 계속 열어보다가 결국 삼층밥을 먹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밥 짓는 것에 실패하는 것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무조건 기다려야 한다, 뜸이라는 것이 있지 아니하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밥 할 때 깨닫습니다. 고기를 구워먹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기는 약한 불에 오랫동안 구어야 한다, 이것이 불문율입니다. 그런데 급하게 뜨거운 불에 고기를 굽는다면 겉은 타버리고 안은 생고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사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성장과 회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기다려주어야 성장하고 기다려주어야 성숙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한 사람이 자라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기다려주는 사람입니다.
  오늘 봄이니까 고등학교 때 배웠던 시 한편을 소개하겠습니다.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기억나시지요 ?

    ( 전병욱 목사님 「모란이 피기까지는」낭독 )

*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저는 김영랑 시인의 시 ‘모란을 피기까지는’을 읽으며 참 지독한 기다림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란은 봄에 핍니다. 봄에 모란이 피는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란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모란이 다 떨어지면 포기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기다린대요. 그다음에 모란이 뚝뚝 떨어져 땅에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렸어요. 그러면 포기해야 될 것 아니에요? 그런데도 기다린대요. 거기다가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다 사라져버렸으면 끝난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기다린대요. 뭘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린대요. 기다리는 사람, 이 시를 외우면서 신앙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지독한 기다림, 가능성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다림, 전혀 기댈 것이 없을 때 소망과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기다림, 모란이 피기까지……
  저는 이것을 읽으면서 로마서 4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로마서 4장 19절을 보니까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모란이 피기까지입니다. 모든 가능성이 다 사라졌을 때에도 기다려주는 것!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되기까지는’ 이 심정을 가지고 한 대상을 기다려준다고 하면 그 영혼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나바의 영성이 바로 ‘모란이 피기까지는’입니다.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끝까지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으면 결국 살아납니다.
  제가 요즘에 설교준비 안하고 자꾸만 영화만 보는 것 같아서 죄송한데 얼마 전에 광복절특사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 ‘재필’로 나온 설경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감옥에 있었습니다. 재필이 감옥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 애인 경순이를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경순이는 ‘분홍립스틱’ 그 노래만 부르면 아무 남자나 따라가버리는 여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필이는 그런 여자를 끝까지 기다립니다. 이 사람이 언제까지 기다리느냐 하면 그 여자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까지…… 그런데 어느날 경심이가 재필이에게 면회를 와서 다른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했더니 광기에 사로잡히지요. 탈옥을 하고 죽이겠다, 살리겠다…… 자기 애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그 소리, 기다림이 끝난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에 더 이상 못 견딥니다.
  저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기다림이 없으면 미친다는 것을, 기다림이 없으면 도저히 감옥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기다림이 사라지면 사람이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가 나오는데 탕자의 아버지를 보십시오. 탕자의 아버지를 한마디로 묘사한다면 기다리는 아버지예요. 아버지의 기다림이 탕자로 하여금 돌아오게 만들고 회복하게 만들었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탕자가 대단한 것이 아니에요. 돼지우리에서 쥐엄열매를 먹는 것이 괴로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배경세팅이 불과합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탕자가 돌아올 수 있는 용기, 탕자가 회복되었던 근거입니다. 기다리는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래요. 누가복음 19장16절에 보니까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기다리는 아버지를 연상했습니다. 용서해 줄 것이라는 아버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회복입니다.
  아버지는 아직 거리가 먼데도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 보고 달려갔습니다. 잘 보십시오. 기다림은 먼저 보게 합니다. 기다림은 절대 걷지 않게 만듭니다. 달려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 기다림이 탕자를 건집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힘으로 능으로 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바나바를 보십시오. 기다려주자고 하니까 마가가 살아나잖아요.
  제가 일전에도 여러 번 반복했던 이야기인데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교회는 시험보는 곳입니까, 훈련하는 곳입니까? 시험은 시험지 나누어 주고 시험을 보게 만듭니다. 한 시간 시험보고 난 다음 채점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커트라인만 정해 놓으면 됩니다. 60점 이상은 합격, 그 이하는 불합격…… 시험은 하루면 끝납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60점 이상의 사람으로 만들고자 할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한번 시험 봐서는 안 되고, 두 번 시험 봐서도 안 되고 어떤 때는 스무 번 시험보아야 될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훈련이에요. 될 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시험하는 곳이 되었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다림이 사라져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정죄하고 평가하고 저 녀석은 될 사람, 안 될 사람 하며 평가하고 있잖아요. 그러나 교회는 시험보는 곳이 아닙니다. 어떤 죄인, 어떤 부족한 사람이 오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랄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훈련하는 곳, 될 때까지…… 그런 의미에서 바나바의 품과 같은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반드시 그런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원로목사님께서 워싱턴에 가셔서 링컨기념관에 갔습니다. 거기서 한탄을 합니다. ‘언제 대한민국에도 이런 훌륭한 대통령이 나오나, 언제 대한민국에도 이런 멋진 민주적인 대통령이 나오나’라고 했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나라도 16번째 대통령까지 가면 그런 사람이 나온다고! 지금 盧武鉉 대통령이 16대 대통령이지만 순서로 따지면 9번째 대통령입니다. 미국식으로 하면 9대 대통령이에요. 7명 더 나오면 링컨 같은 사람 안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분명히 나옵니다. 왜냐하면 삼일교회에서 하나 나올 것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를 몇 년이나 해 보았습니까? 대통령 두 분 정도 전? 세 명쯤 전? 盧泰愚 대통령까지 쳐보아야 15년도 해 보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 해 본지 20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전에는 대통령도 우리가 원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대통령이라고 하니까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여러분, 네이슨 밀러라는 사람이 쓴 책이 하나 있습니다. 「Star Spangled man ; America's Ten Worst Presidents」 그러니까 미국 최악의 열 명의 대통령이라는 책인데 우리나라에는 「이런 대통령 뽑지 맙시다」라고 출간되었습니다. 좋은 책인데 제목이 나빠서 이런 책 절대로 사보지 맙시다처럼 들립니다. 전혀 알려지지는 않았는데 원문은 상당히 좋은 책입니다.
  미국의 대통령 가운데 엉터리 같은 사람 굉장히 많았습니다. 시대착오적이고 우유부단한 윌리엄 태프트(제27대, 1909∼1913), 국민들을 이해하지 않는 냉담한 벤저민 해리슨(제23대, 1889∼1893), 잘생긴 얼굴 밖에는 하나도 내세울 것이 없는, 백악관 물건 훔치다 들킨 프랭클린 피어스(제14대, 1853∼1857)…… 이런 대통령 너절하게 있었습니다.
  미국 대통령, 마흔 몇 명 중에서 골라 봐야 몇 명 괜찮은 것입니다. 미국의 제일 좋은 대통령과 우리나라의 제일 나쁜 대통령을 비교하니까 괜히 자격지심에 빠지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도 링컨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반드시 나옵니다. 이제 겨우 9명밖에 안 되었습니다. 아직도 7명이 더 남았습니다. 다음 번, 그 다음 번에 더 좋은 대통령이 나올지 누가 압니까? 기다려주어야 해요. 백성들이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기대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기다림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과 기다림을 주십니다. 그래서 깊어지게 만듭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아들을 기다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에게 복음의 소식이 전해지잖아요. 마리아와 요셉도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특별히 누가복음 2장25절을 보니까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시몬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뜨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시므온과 함께 하셨어요. 이 노인은 연세 드신 분입니다. 이 사람이 했던 일은 그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 것입니다. 그랬더니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성경은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은 기다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캠퍼스에서 해야 될 일은 캠퍼스의 부흥을 기다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직장의 부흥을 기다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의 가정 가운데 한 사람만 예수 믿게 만드셨는지 아십니까? 가정의 회복을 기다리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 그 한 사람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바나바의 기다림이 마가로 하여금 돌아오게 만들고 회복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다리는 자에게 은혜를 더하십니다. 왜 요즘에 많은 교회들이 수평이동만 있다고 하고 불신자들이 변화 받고 성장하는 것이 없다고 합니까? 우리 안에 기다림의 영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먼지만 날리고 있습니다. 굳어지고 있습니다. 가슴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Love is patient……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기다림에 대한 사랑을 주십시오. 하나님, 믿음 주십시오! 기다림의 믿음을 주십시오!’ 이런 마음이 있어야만 영혼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왜 우리의 많은 자녀들이 가정에서 뛰쳐나가고 의지할 곳이 없다고 하는지 아십니까? 가정조차도 기다림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여기 아버지들이 있습니까? 탕자의 아버지를 기억하십시오. 어떤 아버지가 제일 좋은 아버지입니까? 기다리는 아버지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제일 좋은 어머니입니까? 기다리는 어머니입니다. 어떤 선생님이 제일 좋은 선생님입니까? 학창시절을 추억해 보십시오. 어떤 선생님이 제일 좋은 선생님이었습니까? 나의 겉모습만을 보고 쉽게 평가했던 선생님이 아닙니다. ‘넌 반드시 될 거야, 돌아올 거야, 너는 멋지게 쓰임 받을 거야!’ 하셨던 분입니다.
  기다려야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2. 사람을 세우기 위해 필요한 기다림을 위해 필요한 것,
   종의 영성!

  둘째, 누가 기다릴 수 있는가! 종의 영성을 가져야만 기다릴 수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도 말씀드렸지요. 하나님께서는 숭배의 대상이 되고자 하기보다는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 자신을 내려놓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강자로 오지 않았습니다. 이방 종교의 신을 보면 힘 있는 신으로 묘사됩니다. 다 우락부락합니다. 태국에 있는 어떤 불상을 보니까 발바닥 하나가 제 몸뚱이만 해요. 크고 위압적이고 몽둥이 들고 있고…… 강하다는 것을 표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나오기를 원치 않습니다. 약한 모습으로, 약자로 오셨습니다.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53절에 유명한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잘 보십시오. 예수님의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주관하고 통치하는 모습이 아니라 말 그대로 종의 모습입니다.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왜요? 그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패배하시는 하나님, 사랑 때문에 지신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기다릴 수 있습니까? 종이 되면 기다립니다. 주인이 되면 절대 못 기다립니다. 종의 마음이 되면 기다립니다. 기다림의 영성, 종의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을 밑에 두면 위치에 관계없이 천국이 옵니다.
  바나바를 보면서 우리가 굉장히 감명 받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나바는 마가에 대해서 종의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39절을 보니까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라고 했습니다. 바나바가 바울하고 다툼을 벌였습니다. 왜 다투었지요? 자기 이익 때문에 다투었습니까? 아닙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살리자고 다투었습니다. 한 사람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자고 다투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툼이 있을 때 자기 이익 때문에, 자기가 피해당하는 것을 면하고자 다툽니다. 그런데 바나바 같은 사람이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 다툴 정도로 힘쓰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냥 두 사람 다 성질 안 좋네 하고 간단히 넘어가는데 바나바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만일 바울하고 같이 선교를 다녔으면 성경에도 더 많이 나왔을 것입니다. 2차 전도여행 때도 바나바가 나오고 훨씬 더 명성 있지 않았겠습니까? 바울은 명성 있고 힘 있는 사람이니까 더 많은 부분에서 영향을 미치지 않았겠어요? 그러나 바나바는 그것을 포기하고 연약한 사람의 편이 설 줄을 알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마태복음 8장을 보면서 백부장의 믿음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와 가지고 자기 하인을 고쳐달라고 하잖아요. ‘말씀만 하셔도 됩니다’ 하면서 발버둥치는 모습이 되지 않습니까? 저는 이것이 너무나도 가슴에 와 닿고 나도 좀 이렇게 백부장 같은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고 결심했던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주변에서 자기가 잘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지금 여기에서도 똑똑한 사람들…… 부자되려고, 출세하려고 고시 붙으려고 정말 열심히 삽니다. 그런대로 괜찮은 인생입니다. 참 열심히 살아요. 자기 일에 대해서 너무 열심이에요. 자기 일에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희생하는 희생적인 사람이에요. 포기도 잘 합니다. 자기 인생의 성공을 위해서…… 그런데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경우를 본적은 없습니다. 특별히 자기 밑에 있는 사람……
  백부장의 믿음이 귀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이 아닌 자기 밑에 있는 하인의 유익을 위해서, 하인의 회복을 위해서 몸부림치잖아요. 외치잖아요. 엎드릴 줄 알잖아요! 저는 이것이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비롯해서 우리 교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를 비롯해서 우리 교역자들을 보면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교역자들이 교인들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여야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기 이익 앞에서는 너무 예민합니다. 사실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교역자들이 컴퓨터를 쓰지도 않습니다. 이거 교인들을 위해서 내 놓자고 하면 어느새 다 집어갑니다. 내가 써야 된다고, 내 것이라고! 우리 교회 주보 뒷면에 교역자 이름이 죽 있습니다. 그것은 선임 순이거든요. 그런데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누가 실수로 이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때 분노하는 교역자를 보았습니다. 내가 먼저 왔는데 왜 뒤에 있느냐고! 가끔 주보를 보면 헌금자 명단에 이름 틀린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물어봅니다. ‘앗! 이거 이름 틀렸는데?’ 그러나 신경도 안 씁니다. ‘틀릴 수도 있지 머 그거 가지고 그래요?’ 그러고 자기이름은 뒤에, 틀린 것도 아니고 그저 차례가 바뀌었을 뿐인데 펄펄 뜁니다. 자기 자리 확보 안 되면 펄펄 뜁니다. 자기 이익에 대해서는 그렇게 예민해요. 자기 이름, 자기 이익, 자기에게 주어지는 권리는 어떻게든 찾아먹어요. 하여튼 묘합니다.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어떻게든 다 받아먹어요. 좋습니다, 좋아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열정을 가지고 성도들의 어려움, 성도들이 넘어진 것, 성도들의 안타까움, 성도들의 불의를 놓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한 번이라고 보고 싶어요. 그것이 중요한 것 아닙니까?
  우리기 지금 껍데기가 제대로 된 것 같이 보이지만 속은 텅 비어 있고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종의 마음이 없습니다. 다 주인의 마음입니다. 우리 교회 전체가 다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이익이 아니라 연약한 사람들, 더 어려운 사람들, 밑에 있는 사람들, 그들의 이익 때문에 발버둥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납니다.
  누가 종이 될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서 오늘 같이 이런 설교, ‘다같이 종이 됩시다’라고 하면 은혜받는 사람이 있고 열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받는 사람은 충만한 사람입니다. 채워진 사람, 충만한 사람에게 ‘종이 되십시오’ 하면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 내가 마음이 높아져 있지 낮아져야지, 섬겨야지. 내가 이제까지 내 이익만 위해서 살았지, 섬기며 살아야지……’ 은혜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충만하니까 낮아질 수 있어요. 그런데 원래 비어있는 사람에게 종이 되라고 하면 싸움 납니다. 원래 작은 사람에게 종이 되라고 하면 휘발유 들고 나옵니다. ‘나 부족하다 어쩔래! 니 속에는 머 들어 있나 확인해 볼까?’ 하면서 칼 들고 나오고…… 내가 비어있고 내가 문제가 있을 때는 종이 되라는 메시지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내속에 하나님의 영성으로 가득 채워 주시면 종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생깁니다.
  여러분, 짐승과는 다르게 인간만이 갖고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초월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더 고귀하고 가치있는 것을 위해서 자기의 이익을 버릴 수 있는 모습을 초월이라고 합니다. 인간만이 초월할 수 있습니다. 생명까지도 스스로 드릴 수 있습니다. 스스로 지는 십자가! 그것이 초월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가치를 드높이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초월의 능력에 있습니다. 자기 가치를 높이는 것! 우리 다같이 예수님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는데 예수님같이 되는 모습이 어디에 있습니까? 낮아지는 것, 성육신의 원리,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 그러면 살아나게 됩니다.
  우리는 썩어야 됩니다. 그냥 썩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쌀이 있습니다. 쌀알을 보면, 제가 생물학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잘은 모르겠지만 거기에 생명의 핵이 있잖아요. 그 핵은 현미경적인 크기 아닙니까? 그거 빼 놓고 나머지는 썩으면서, 핵 하나를 살려서 열매맺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 품고 썩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이 살아납니다. 예수님께서 그 얘기를 쉽게 얘기했지요. 요한복음 12장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것이 바나바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의 원리입니다. 생명을 품고 말씀을 품고 썩고 죽으면 열매 거두게 됩니다. 생명은 반드시 종의 마음을 품고 죽는 자를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삼일교회가 2003년 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더 깊이 있고 더 강력한 하나님의 교회로 거듭나게 될 줄로 확신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바나바같이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품는 사람이 됩시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것 두 가지,
1. 기다림이 있어야 자라납니다.
  기다림의 영성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2. 기다림은 종의 영성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종의 마음을 가지고 많은 영혼을 품고 썩어 죽기를 원하는,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같이 하나님 앞에 간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나바같이 다른 영혼 살리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죽고 썩을 수 있도록 인도해달라고 이 시간에 다 같이 간구하도록 하겠습니다.

    ( 성도들 모두 다 기도 )

  전병욱 목사님 : 기다림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먼지만 날리는 가슴, 굳여진 가슴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기다리는 아버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기다림을 통해서 영혼들을 품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기다림은 오직 종의 마음을 품은 자들을 통해서만 채워질 줄 압니다. 하나님의 가슴이 종의 가슴입니다. 우리도 종의 가슴을 품고 이 땅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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