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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성경적 상담 9 - 용서와 자유함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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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 우기자 촬영


          
                    용서와 자유함에 관하여  

    1. 먼저 생각하기

김집사님은 한국에 있을 때 작은 사업체를 가진 사장이었습니다.  인정 많고
성실하기도 소문났었습니다.  많은 친척들이 김집사님의 신세를 졌습니다.  그 중에 손위처남은 특히 큰 신세를 졌습니다.  손위 처남이 미국으로 오기 전 김집사님은 미국에서 정착할 수 있는 비용을 무상으로 빌려주었고, 한국에 남아 있는 빚을 정리해 줬습니다.  

90년대 말 한국에 경제위기가 왔을 때 김집사님도 사업체를 정리해야 했습니다.  대학에 다니는 딸 둘을 한국에 남겨 놓고 막내 아들을 위해서 교육 환경이 좋다는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먼저 건너온 처남이 있었기 때문에 든든했습니다.  처남은 그래도 제법 성공해서 세탁소를 두개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집사님과 아내는 처남이 이전에 신세진 일을 잊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처남에 대한 기대는 미국으로 건너오던 날부터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처남의 세탁소는 늘 일손이 딸렸습니다.  사람들을 많이 쓰지 않고 가족들이 일의 많은 부분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김집사님과 아내는 짐을 채 풀기도 전에 세탁소 일을 해야 했습니다.  “어휴…. 그렇게 하면 어떻게… 줘봐…. 맡긴 내가 잘못이지…. 나원… 이것도 못해서 어떻게 미국에서 살겠다구….”  김집사님과 아내는 첫날부터 온갖 핀잔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영어 한마디도 못하면서 미국에는 왜 왔어요?  쯧쯧쯧….”  “뭘 안다고 그래요…. 시키는대로 해요….”  차를 살 때도, 집을 얻을 때도, 전기와 전화를 신청할 때도 한참을 늦게 도와준 처남댁과 조카들은 무시와 경멸의 말투를 달고 다녔습니다.
        
정작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습니다.  아직 일이 익숙하지 않고 도와준다는 이유로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세탁 공장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몰래 물어 보았더니 자신들은 두 사람이 일하고서도 한사람 몫만 받고 있었습니다.  김집사님은 화가 나서 따지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처남은 “먹여주고 일시켜 줬더니 못하는 소리가 없군.  이 공장에서 영주권 받으려면 알아서 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일년 반을 그 공장에서 일하던 부부는 처남네와 결별을 선언하고 일을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그 무렵부터 사람 좋던 김집사님의 눈빛이 바뀌었습니다.  저녁 늦은 시간까지 각각 일터에서 일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있습니다.  “복수할겁니다.  꼭 보여주고 말겁니다.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요즘 늘 웃던 김집사님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입에는 복수라는 말이 늘 붙어 있습니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직장과 집을 왔다갔다 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김집사님은 직장에서 돌아오다가 경미한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범퍼가 조금 찌그러졌습니다.  김집사님은 교통사고 소송 전문이라는 유대인 변호사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2만 5천불을 받아냈습니다.  김집사님의 미국 생활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2. 주의해서 성경읽기

마태복음 18장 21-35절을 읽고 다음의 질문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대답해 봅시다.

  1)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두 사람이 일치하는 점은 무엇입니까?

        a.        인간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의 가능성에 대하여

        b.        용서의 당위성에 대하여

  2)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두 사람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a.        용서의 근거에 대하여

       - 베드로 : 아무리 용서해도 변화되지 않는 사람은 용서받을 가치가 없다
                  네가 용서 받을 가치가 있어야 내가 용서한다.
        
       - 예수님 : 내게 있는 사랑으로 너를 용서한다.

       - 우리의 죄 사함 받음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b. 용서의 시기에 대하여


        - 베드로는 언제 용서했습니까?  베드로는 과연 용서했습니까?

        - 예수님은 언제 용서하십니까?  시 103편 12절, 요일1장 9절        

        - 용서는 미뤄지거나 셀 수 있는 것입니까?


        c.        용서의 한계는 어디까지 입니까?


        - 베드로의 일곱 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일흔 번의 일곱 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3. 깊이 생각하기 – 감옥에 갇혀 있는 신하를 생각하며

예수님의 비유의 주인공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감옥에 있습니다.  그는 거리를 활보하다가 친구를 만났고 친구를 가두었더니 자신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왜 그가 감옥에 갇혀야 합니까?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성경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감옥에 갇힌 사람과 같다고 말합니다.  용서하지 못함으로 그는 분노합니다.  정죄합니다.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안에 이미 존재하고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자기 삶에서 하나님의 처소를 마련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유하되 갇힌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감옥에 둔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그는 스스로 그 감옥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여러분에게 삶을 통해서 이미 경험되고 있을 것입니다.  미움을
받는 사람보다 미워하는 사람이 더 괴로운 것이요, 증오와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이 그 대상보다 더 큰 괴로움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 삶에 튼튼히 박아둔 그 감정의 창살들에 가려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보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감옥에 갇힌 그 신하에게 다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희망이 있을까요? 그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왕의 진노의 크기와 그의 빚의 크기를 생각해 보면 그에게는 희망은 없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그가 빚을 다 갚기까지 감옥에 있는다고 했고, 결국 그는 그곳에서 남은 생을 보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신하가 빚을 갚고 감옥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35절의 말씀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베드로를 예수님의 비유에 나타나는 그 신하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을까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을까요?  분노 안에 있을까요?  용서의 은혜 가운데 있을까요?  정죄의 창살 안에 있을까요?  자유인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이라는 말과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같이 하시리라” 사이에는 한 구절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서 주시고자 하는 멧세지가 “용서하지 말라”가 아닌 “용서하라”요, “너희를 가두겠다”가 아니라 “너희를 용서하겠다”라면 이 사이에 “너희가 용서할 때까지”라는 말을 넣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중심으로 너희의 형제를 용서할 수 있을 때까지
    너희는 너희 스스로를 속박하는 감정의 굴레, 분노의 사슬,
    증오의 창살에 갇혀서 자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중심으로 너희 형제를 용서할 때 너희는 자유할 것이다“  

하나님은 용서를 번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대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을
주십니다.우리를 징계로 다스리시지 않고 변화되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과 같이 이웃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될 때까지” 우리를 준비시키시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가 옥에 갇혀 있음을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시간 가운데 감옥을 벗어나 자유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4. 적용하기 – 다시 김 집사님을 생각하며

김집사님은 미국이라고 하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자유를 잃고 말았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 자신의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유를 빼앗기고 분노와 증오와 속박과 한숨을 얻었습니다.
        
한 사람의 분노와 증오는 다른 사람에게 확대되고 재생산됩니다.  김집사님은 처남에게 받은 상처를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드러냈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에게 자신의 상처를 드러낸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드러낼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김집사님의 삶은 지금 심각한 위기 가운데 놓여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감정에 대해 자유로우십니까?  잊을 수 없는 분노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오랫동안 참고 또 참아서 반드시 돌려주고야 말 그 어떤 것을 마음 속에 묻어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차라리 잊고 만다고 말하면서 용서를 거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보지 않고 만나지 않으면 된다고 말하면서 분명한 사랑의 요구를 거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이 차가워지고 냉소적이 되는 그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영적인 자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옥에 갇혀 있습니까?  여러분은 자유합니까?  



필라델피아에서 가일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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