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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가르치며 배우며 - 피아니스트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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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음악 수업의 주제는 “삶과 음악”입니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지난달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 각색상을 수상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를 수업자료로 활용하였습니다. 감독 개인의 스캔들 의혹이나 배타적 시오니즘 등을 충분히 경계하더라도 이 영화는 다시 보고 싶은 영화 목록에 꼭 올리고 싶은 작품입니다. 홀로코스트(나치의 유태인 학살)를 다룬 그 동안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나 <인생은 아름다워>보다 비교적 평정을 잃지 않은 채 역사의 비극을 담담한 어조로 영상에 담아 내고 있습니다.

영화는 유태계 폴란드인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바르샤바 방송국에서 피아니스트로 일하던 스필만(애드리언 브로디)은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에 의해 유태인만의 거주지역인 ‘게토’에 갇히게 됩니다. 그 곳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며 수많은 생사의 고비를 맞게 됩니다. 많은 유태인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어갔고 그의 가족들도 결국은 돌아올 수 없는 아우슈비츠행 기차를 타게 됩니다. 홀로 ‘게토’를 탈출한 스필만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처절하고도 지난한 생존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특별히 다음의 두 장면은 제게 가장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수용소를 탈출한 스필만은 지인의 도움으로 폴란드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독일군 사령부 건물 앞의 빈 아파트에 숨어 살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가 다른 주민들에게 노출되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그는 철저한 침묵 속에 은신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거실에는 피아노가 놓여 있습니다. 그 앞에 앉습니다. 그 동안 수많은 살육의 현장을 지켜보았고 그의 가족들 또한 죽음의 길로 떠났습니다. 자신 또한 무수한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쳐있습니다. 현실은 여전히 안전한 삶을 담보할 수 없는 지극히 불투명한 최악의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전쟁도, 그 어떤 폭력도 그의 영혼까지는 제압할 수 없었습니다. 건반을 누를 수도, 소리를 낼 수도 없었지만 피아노를 연주하는 흉내만으로 이미 그의 영혼은 아름답고도 슬픈 쇼팽의 음악 세계로 한없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막스입니다. 숨어 지내던 아파트가 폭격을 당하여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된 스필만은 폐허로 변한 어느 낡은 건물의 다락방에 은신하게 됩니다. 이제는 그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추위와 굶주림에 쇠약한 모습의 스필만은 녹슨 야채 통조림 깡통을 발견하게 됩니다. 망치를 두들겨 깡통을 따던 중 그만 순찰 중이던 독일군 장교 호센 필드(토마스 크레슈만)에게 발각되고 맙니다. 한눈에 유태인 도망자임을 눈치챈 독일군 장교가 스필만에게 신분을 대라고 요구하자 스필만은 자신이 피아니스트였다고 말합니다. 한동안 침묵 속에 스필만의 초라한 행색을 바라보던 독일군 장교는 피아노 연주를 명령합니다.

전쟁의 광풍과 오랜 피신 생활에 지친 스필만은 더 이상 고상한 음악가가 아니라 죽음 앞에서 너무도 나약할 수 밖에 없는 범부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해어져 남루한 옷가지,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 산발 된 머리카락 그리고 거칠고 투박해진 손마디 사이로 그의 일생의 마지막일 수 있는 피아노 연주가 시작됩니다. 이 연주가 끝나면 그 순간 그는 독일군에 의해 죽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가슴을 베일 것 같은 애잔함이 녹아있는 쇼팽의 발라드 1번 G단조(작품 23)가 흘러나옵니다. 한음 한음에 혼신을 다한 그의 연주는 스산하기만 한 건물 이곳 저곳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채워 갑니다. 무심히 스필만을 바라보던 독일군 장교의 눈빛과 표정에 어느 순간 작은 일렁임이 일어납니다. 스필만의 음악은 독일군 장교의 마음을 열게 합니다. 결국 그의 도움으로 그는 이 절망적인 전쟁에서 살아 남게 됩니다.

학생들에게 유태인의 명멸의 역사와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내용을 설명한 후 이 두 장면의 피아노 연주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평소 그렇게도 산만하던 아이들이었으나 이 순간 만큼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영화에 그리고 음악에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줍니다. 아이들의 소감을 듣습니다. “선생님! 눈물이 날 만큼 음악이 아름다워요”, “음 하나 하나에 혼신을 다하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에요”, “삶은 서로 돕는 것이에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겠어요”……

오늘도 가르치려고 시작한 수업이었으나 오히려 아이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성안교회 시온찬양대 회보 중 지휘자 칼럼> 2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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