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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찜질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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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국민학교 시절 ‘용의검사’를 할 때가 있었다. 가난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정마다 샤워실이 없었고 일 년에 오직 몇 회만 가서 몸을 깨끗이 할 때가 있었다. 그 때의 ‘공중목욕탕’은 ‘사우나’로 바뀌어 지고, 이제는 ‘불가마’나 ‘찜질방’으로 바뀌어졌다. 그래서 동네 공중목욕탕이 점점 경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목욕탕 환경도 바뀌어 져서 몸만 깨끗이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기도 한다.

무릎이 아프거나 신경통이 있으면 사람들은 ‘불가마’나 ‘찜질방’을 찾는다. 게르마늄 선을 쬐면서 땀을 20-30분가량 흘린다. 그리고 피곤한 사람들은 여인숙에서 숙박하는 것보다 찜질방에 들어가서 여행에 지친 몸을 깨끗이 목욕하고 잠을 청한다. 음식을 먹고 싶으면 찜질방 밖에서 먹는 것이 아니고 그곳에서 음식을 먹는다. 또 밤새 일어나는 진풍경은 찜질방을 한번 즈음 찾아가신 분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기억날 것이고 빙그레 미소를 지을 것이라 믿어진다.

서비스업이기 때문에 보다 나은 환경과 편익 시설이 있는 찜질방을 고객들은 선호한다. 그래서 서비스가 좋지 않거나 청결하지 못한 찜질방을 애용하다가도 더 나은 시설이 갖추어진 곳이 근처에 생기면 고객들은 어느새 새로 생겨 나은 환경을 갖춘 곳으로 옮겨간다. 그래서 항상 시설을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고객을 잃고 만다. 사람들이 복잡한 찜질방보다 사람들이 복잡하지 않고 최신식이고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을 고객들은 선호한다.

어느 음식점을 보면, ‘원조’라는 말을 써서 자신의 음식점이 보다 고대성을 가진 기원적인 음식점을 자처한다. 그윽한 음식의 맛을 간직하고 있다고 자처한다. 음식은 손끝에서 나오기 때문에 시설보다도 음식 맛을 더 내세우는 가보다. 주차장도 없고, 등받이 없는 나무이고, 친절한 웨이터가 없어도 줄을 서서 기다려야 겨우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앉아서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시간 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또 불편한 자리에 앉아 먹지만 음식 맛을 따라 사람들은 멀리서도 찾아든다.

오래된 음식점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대체적으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음식점을 찾는다. 찜질방과 음식점은 이런 면에서 차이점이 있는 듯하다. 항상 다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 .

요즈음 한국교회는 ‘수평적 이동’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사용된다. 이 교회에서 상처를 입으면 저 교회로 옮긴다. 항존직 직분자들이 집을 이주하거나 직장을 따라 옮기는 경우는 어쩔 수 없더라도 자주 나타나는 현상은 신자들이 자신의 기호에 맞는 교회를 찾아 나선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설교, 교육, 환경, 프로그램, 교제 등등의 이유를 들어 옮긴다. 마치 입맛에 맞는 음식점을 찾듯이 신자들은 자주 교회당을 옮겨 다닌다.

또 ‘전원교회’라 해서 가정마다 자동차가 있기 때문에 존경하고 선호하는 목사님과 친교가 이뤄지는 교회당이 있으면 신자들은 찾아간다. 과거의 캐캐묶은 새벽기도, 주일저녁예배, 수요저녁예배, 등등은 이미 과거의 유산이 되곤 한다. 그래서 주일 낮 예배 참석자들 수의 반이 주일저녁예배에, 주일저녁예배 참석자들의 수의 반이 수요저녁예배 참석, 수요저녁예배 참석자들의 수의 반이 새벽기도회에 참여한다고 한다. 하지만 요즈음은 그렇지 않는 것 같다. 저녁예배보다 오후예배와 주중 성경공부를 선호하는 추세이다.

과거에는 녹음하여 설교를 듣는 가하면, 요즈음은 인터넷을 통해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는다. 인격적 교제가 없어도 컴퓨터 앞에 앉아 설교를 듣는다. 마치 우상 앞에 앉아서 묵상하는 것처럼 전자 매개체가 현대판 형상들이 되어 우리 앞에 등장했다. 힘들고 기나 긴 것을 참지 못한다. 그저 단일적이고, 단회적이고, 단순해야 한다. 한 번 모임으로 모든 모임을 해결해야한다. 주일 하루에 모든 모임들과 자치적 모임들이 다 해결 나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편익 시설이 필요한 것이다. 개척교회들은 예배당의 시설을 카페식으로 바꿔야만 한단다. 조명, 음향, 그리고 프로젝트 시설들이 첨단을 달린다.

교회의 모든 일들은 즐겁게 행해야 한다. 즐겁지도 않은데 심령들은 힘들고 진리의 깨달음이 없는데도 프로그램을 통해 즐겁다고 느끼도록 강요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진리의 발견이 아니라 진리의 맛을 모르는데 즐거워야한다. 정신없이 부르는 노랫소리로 인해 사람들은 흥이 난다. 가사에 음미하기도 전에 바른 템포로 인해 정신이 없다. 마치 노래방을 연상하는 듯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회개와 자복보다 행복과 기쁨을 선호한다. 심오함보다 희락을 선호한다. 더욱이 말씀을 올바로 전하는 설교자를 찾는 노력은 계속된다. 힘들더라도 찾아가서 말씀을 듣고자 한다. 한번 듣는 설교라도 감동적인 설교를 듣기 위함이다.

그런데 교회는 현대적 기호품인 찜질방과 전적으로 다르다. 잠시 쉬고 가는 곳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게르마늄 선을 쬐면서 쉬는 곳과 다르다. 시설이 좋아지고 서비스가 좋아진다고 하여 교회를 옮기지 않는다. 시설이 못하더라도 위치가 좋질 않아도 음식 맛을 좇는 것처럼 말씀을 찾아 사람들은 모여든다. 하지만 교회는 이러한 수평적 움직임과는 다르다. 교회는 음식점과도 다르다.

오래되고 기원적인 맛을 보러오는 고객과 흡사한 면이 있지만 맛만을 보러오는 신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그 가운데 기쁨과 위로를 받는다. 교회가 세속화 되어가는 모습을 본다. 마음이 아프다. 말씀의 발견으로 인한 회개 그리고 기쁨을 찾을 수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라은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www.eunr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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