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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도 쓰임받아야 합니다 / 왕상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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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 노성현 목사 [[email protected]
제 목 :  당신도 쓰임받아야 합니다(왕상17:1-5)

하나님이 교회나 그 시대에 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선물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쓰임받아 살며, 그로 인해 주위의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주는 사람입니다. 그 중에 우뚝 선 사람이 데이빗 브레이너드입니다.
그는 인디안 선교에 전 생애를 바치고 꽃처럼 붉은 29세 청년의 때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책은 그분의 평범한 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일기처럼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바꿔놓고 변화시킨 도구도 드물 것입니다. 저 유명한 죠나단 에드워즈, 요한 웨슬레, 윌리암 케리, 짐 엘리엇 같은 수많은 당대의 선교사들도 이 일기책을 읽고 생이 변화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일기 중 죽음 직전에 썼던 어느 날의 일기 한 부분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10월 11일 저녁에는 지독한 열과 괴로움을 주는 오한에 시달렸다. 이제는 완전히 탈진한 상태여서 더 이상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기란 불가능한 것 같다. 다만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고통은 내가 지금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사실이다. 힘이 닿는 데까지 내가 맡은 일을 다하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주 앞에 죄송스러운 일인가. 아!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신 그 뜻을 저버리면 안 될 텐데.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그분 앞에 부끄럼 없는 모습으로서야 할 터인데..."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신 자에게 몇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내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 하나님께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신앙인의 긴 나그네 여정에서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하는 실존적인 문제입니다. 그냥 교회당 마당만 밟고 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크든 작든 하나님께 유용하게 쓰임을 받는 것. 그리고 그 가운데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것. 신앙인으로 살면서 그것만큼 소중한 것은 없는 줄 압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가운데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유용하게 쓰임받는 자가 되는 것을 소망하지 않는 부모는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하나님이 쓰실까요? 과연 나라는 부족한 자도 하나님 나라의 일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일까요? 나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쓰실까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추수에 기쁨으로 참예하는 자가 될까요?
오늘 이 신앙인의 진지한 질문 앞에 하나님은 한 사람을 실예로 들어서 분명하게 답하고 계십니다.

열왕기 시대의 이스라엘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부패에 부패를 거듭합니다. 국가는 극도로 창궐한 이방종교의 텃밭이 되어버린지 이미 오래입니다. 백성들은 또 한번의 사사기 시대를 재연하고 있습니다. 어른이건 아이건 믿음의 골격을 잃어버렸습니다. 삶의 가치와 원리도 다 잃은 채 흐느적거리며 연체동물처럼 살아갑니다.
한마디로 모든 사람이 타락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하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저지르는 죄악으로 인해 양심이 뜨거워지지 않던 추잡한 시대입니다.

죄에 대해 아무런 느낌도 없이 표류하던 시대. 이 칠흙같이 어두운 흑암의 시대에 광명의 횃불을 높이 든 한 사람이 있습니다. 엘리야입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 이 짧은 한마디가 엘리야에 대한 프로필의 전부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무대위로 등장할 때마다 대부분의 경우 상당한 분량의 개인 프로필을 제공합니다. 하다못해 그들의 직업내지는, 왜 부르셨는지 간단한 배경만이라도 소개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그러나 엘리야에게는 그 흔한 소개마저도 없이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의 등장은 독자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할만한 하나님의 이벤트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무명의 용사입니다.
그는 모세처럼 왕궁에서 훈련을 받은 인물도 아닙니다. 바울처럼 학문적인 수련을 받은 세련된 인텔리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신학교에서 발탁된 인물은 더더군다나 아닙니다. 한갓 길르앗이라는 촌동네에 살고 있는 필부였습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디셉이라는 촌동네 출신입니다.
그 누구도 엘리야를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설마 길르앗 디셉 동네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나올 줄 그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지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 민족의 등불을 밝히기 위한 작업을 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길르앗의 산골벽촌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조용히 기르시고 계십니다. 아마도 우리 중에 지금까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온 분이 계실 것입니다. 또한 남에게 이렇다하게 내보일만한 경력이나 학력이 없어 늘 자격지심에 젖어 있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나같은 사람도 쓰실까 자신없어 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별볼일 없어 보이던 촌부를 사용하시던 그 엘리야의 하나님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름 석자 변변찮게 알려지지 않았던 그 무명의 사람 엘리야를 사용하셨다면 이 암흑의 시대를 밝히기 위해 우리를 사용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니다라고 말해서도 안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사람이 아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라고 말해서도 안됩니다.


1. 하나님께서 쓰실 사람은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아무나 무작위로 사람을 뽑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대포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의 인사는 철두철미합니다. 엘리야에겐 하나님이 사용하실 그 무언가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의 신앙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매우 짤막한 고백입니다. "아니 그 정도 신앙고백이야 누구나 다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내를 알면 이것이 그렇게 간단한 신앙고백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회식자리에서 "난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술은 못마십니다." 그 정도의 고백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온 나라가 여호와가 아닌 바알 우상을 신으로 섬기고 있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온 땅이 바알의 상표를 붙이고 살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일말의 미련은 있었지만 그러나 바알신을 택하는 것이 그들의 삶에 훨씬 유리했습니다.

하나님과 한 손, 바알 귀신과 한 손을 잡은 백성들을 향해, 한 번은 하나님 편 나머지 아홉 번은 세상 편에 서는 신앙의 박쥐같은 사람들을 향해, 좋을 때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가 전세가 역전되면 곧바로 헌신짝처럼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에게 무릎을 꿇었던 그 지조없던 아합왕을 향해 분명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하나님은 엘리야의 이 메세지를 오늘 우리에게도 던지십니다. 한 번은 하나님, 또 한 번은 세상, 한 번은 하나님 또 한 번은 돈, 한 번은 하나님 또 한 번은 나 자신을 위하여 살아가는 철새같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너희들이 섬기는 나,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고 살아계신 신이라고... 언제까지 머뭇머뭇 결정하지 못하고 그런 삶을 살겠느냐고... 언제까지 박쥐의 고민을 하고만 있을 것이냐고... 언제까지 샌드위치처럼 세상과 천국에 끼어 살겠느냐고...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귀있는 자는 들으시길 바랍니다.

의식없이 살던 때는 고민이 없었습니다. 죄를 몰랐을 때는 갈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나서는 죄가 무엇인지, 의로운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 쓰임받을 것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편에 설 것인지 분명하게 결단해야만 합니다.

저는 울산교회에 온 지 60개월이 되었습니다. 60개월이 지나오는 동안 이런 저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강도사 인허를 받자마자 지구를 맡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그 장례는 목사님 가정의 장례였습니다. 아들, 사위가 목사님이셨고 저보다 십수년 선배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을 인도하는 것이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 발인예배가 드려지는 그 날 수많은 동기 목사님들이 참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관예배를 드릴 때도 초년병 강도사가 그 많은 목사님을 앞에 두고 예배를 인도해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저를 대학 때 가르치셨던 목사님 마저 그 자리에 참석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금도 당황스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준비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죽음에 대해서 제법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60개월을 지나오면서 지난 주 금요일 늦은 저녁 태풍이 한반도에 발자국을 내려딛는 날 저는 가장 황당한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 내일 누구 누구 결혼하시는 것 아시죠? 목사님이 오셔서 그분을 신랑에게 인도해 주어야겠습니다. 그분 가정에 남자 아무도 오실 분이 없습니다. 그러니 목사님이 오셔서 그분을 신랑에게 인도해 주십시오."
"집사님, 사람이 없으면 요즘은 함께 입장을 많이 합니다. 함께 입장하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그런데 목사님, 그럴 상황이 아닙니다. 꼭 오셔서 목사님이 인도를 해 주셔야 합니다."

차라리 주례를 하라고 하면 하겠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늦은 밤이었기 때문에 내일 장로님이 오시니까 장로님께 부탁하면 되겠다. 장로님은 연배가 높으시니까 충분히 가능하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일 갑작스럽게 당회가 소집되어서 장로님께서 오실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다른 장로님께 연락할 수 없는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습니다.

머리 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갑니다. '신부보다 더 젊은 사람이 신부를 인도하는게 맞는가. 세상에 결혼식을 많이 다녔지만 이렇게 젊은 사람이 신부를 인도해도 되는 것인가. 오늘 핵심은 신부인데 사람들이 신부 손을 잡고 나오는 나를 보면서 신랑보다 더 젊다고 놀리지는 않을까.' 오만 생각이 스쳐지나갑니다.
그러나 식장에 도착했을 때 저는 마음을 다르게 먹었습니다. '내가 황제처럼 당당하게 신부를 신랑에게 인도해야지...' 그리고 누가 뭐라고 하든지 황제처럼 당당하게 인도해서 신랑에게 그 손을 넘겼습니다. 신부 아버지의 자리에 영적인 아버지의 자격으로 앉아서 그 가정을 위해서 전심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불과 3개월 정도 전 이 분은 울산교회에 새가족으로 등록하신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나신 분입니다. 구역장님과 그 가정을 심방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끝내고 나오는 길에 "이제 하나님을 믿게 되었으니 동거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기도하시면서 결혼식을 올리십시오. 남편이 믿지 않아도 기도하시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줄 것입니다." 무심결에 그렇게 얘기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분과 참석했던 구역장님은 그 말을 아주 깊게 새겨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열심히 기도하며 믿지 않는 남편을 설득해서 결혼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경주천은 이제 한 두 시간 후면 범람 할 것 같았습니다. 울산 국도는 곳곳에서 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마치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차를 타고 내려옵니다. 세찬 빗줄기는 천지를 뒤엎을 것 같은 태풍의 세력을 힘입어 운전자를 괴롭힙니다. 주변의 실개천은 이미 범람해 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속에는 은혜의 강물이 범람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하나님을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 편에 서려고 발버둥을 친 어린 성도, 그 성도를 하나님 편에 분명히 세우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도왔던 구역장...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은 취미활동이 아닙니다. 여가활동이 아닙니다. 사회활동이나 동호회활동도 아닙니다. 내 전 생애를 걸고 마음과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섬겨야 할 그 가슴 벅찬 일이 신앙생활입니다. 복 주시면 헤헤거리고, 조금 어려워지면 원망하는 감정의 파도타기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 편에 분명히 설 수 있는 그 사람. 여건이 어떠하든지 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고 분명히 선언할 수 있는 그 사람. 세상보다 하나님이 더 큼을 선명하게 선택할 수 있는 그 사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2. 그렇기에 여호와의 사심을 확실히 믿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담대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입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 엘리야는 철저히 혼자입니다.
로빈슨 크로소우처럼 무인도에서 혼자 있었으면 차라리 낫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둘러싸여 있으면서 지금 철저하게 혼자입니다. 사람들과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양다리 걸치며 적당히 살아갈 때에, 그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말을 가슴에 담고 아합왕에게 올라갑니다.
아합을 향해 목숨을 걸고 길 떠나는 엘리야를 보고 길르앗 디셉동네 사람들이 왜 이러냐고 말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발목을 잡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막상 길을 떠나오면서도 메울 수 없는 고독이 엄습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좀 광신적으로 믿고 있는 건 아닌가 회의가 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한 국가의 왕에게 선전포고를 합니다.
"나같은 촌놈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소. 나같이 일개 산지에 뭍혀 사는 농민도 하나님한 분만을 섬기는데. 도대체 당신은 일개국의 왕이면서 무엇을 숭배하고 있는 것이요. 앞으로 다시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없을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대로, 절대권력을 지닌 아합과 이세벨을 상대로 엘리야는 지금 홀로 서서 선전포고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를 도와줄런지 모릅니다. 아니 주변에 동역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합의 부패한 칼날이 곧장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그 누구도 뺏을 수 없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용기백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용기있는 사람을 사용하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십니까? 그분만이 참 신이심을 아멘하십니까? 그렇다면 세상에 대해 담대하시길 바랍니다. 용기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주눅들지 마시길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 쓰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용기있는 사람에게 곧장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도무지 석연찮은 명령입니다.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3-4)."

하나님께서는 그릿 시내로 숨으라고 강권하십니다. 물론 엘리야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겨우 한 마디 하고 뺑소니 치려고 왕에게 폭탄선언을 한 것은 아니니까요.
한 번 더 생각해도 이건 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부패한 정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면 굳이 피신시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천군천사를 보내어서 아합의 사람들이 그를 손대지도 못하게 능력을 베푸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치졸하게 보일만큼 자신을 숨어서 살도록 피신시킬까요? 적절한 설명도 없습니다.

이 명령은 애시당초 뭔가 아구가 맞질 않습니다. 뭔가 대꾸해 볼 수 있는 명령입니다. 솔직히 듣고 싶지 않은 명령입니다. 남자가 칼을 뺐으면 무라도 베어야 하지 않습니까?
다시 한 번 엘리야의 심정으로 이 구절을 보십시오. 엘리야는 불타오르는 열정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서 아합을 찾아왔습니다. 아합이 그의 말을 듣자마자 칼 든 자들에게 "저 놈의 목을 단칼에 날려버려라." 하여 단칼에 목이 베인다 할지라도 오히려 목을 길게 뺄지언정 자기 발로 후퇴할 사람은 아닙니다. 순교를 각오하고 왔습니다.

그뿐입니까? 지금 온 백성들의 시선이 자기에게로 주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위대한 용기를 가지고 나아갔던 엘리야에게 "너는 거기를 떠나라 그리고 그릿 시냇가에 가서 숨어 있으라 그러면 내가 까마귀들을 보내어서 너를 먹여주리라"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방금 부르시고선 이게 뭐 애들 장난하는 겁니까? 그럴려면 애시당초 좀 더 기다리신 다음에야 부르실 일이지 사람 왜 이리 난처하게 만드십니까? 지금 절 가지고 장난하시는 겁니까? 지금 뺑소니치면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겠습니까?
뭐 먹을 것을 주신다고요? 지금 제가 먹고살겠다고 이 일을 한 줄 아십니까? 제가 뭐 떡과 고기를 못먹어서 목숨을 걸었던 줄 아십니까? 아니 하나님, 사람을 어떻게 보시고 이러십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내 인생 불태워버리겠다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올라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숨으라니요? 어떻게 그런 자존심 상하는 명령을 하십니까?
차라리 순교하라 그러십시오. 초개같이 이 한 목숨 내어놓겠습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대체 왜 그러시는지 제가 납득이 되도록 이유나 설명해 주십시오."

이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일 수 없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엘리야가 배워야 했던 가장 중요한 훈련이었습니다.
지금 엘리야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용기가 아닙니다. 순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순종이었습니다. 그 순종의 훈련을 엘리야는 마스터해야만 했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18장의 갈멜산으로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내 뜻과 맞지 않고 내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황당무계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성을 하루에 한 바퀴씩 돌아라. 그리고 일곱 번째 되는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아라."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때 장면을 상상해보면 우스꽝스러운 얘기입니다. 200만 300만이나 되는 그 많은 사람들이 전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뱅글뱅글 돌고 있습니다. 무슨 신비한 주문을 외우면서 도는 것도 아닙니다. 꿀먹은 벙어리처럼 행진하고 있습니다. 마치 바보들의 행진 같습니다. 한 번 상식적으로 그 몰골을 생각해 보십시오.

위에서는 성문을 다 닫은 채 "야 저 이스라엘 사람들 뭐 하는 거야? 우리 성을 공격하러 온 사람들 아냐? 참 멍청한 사람들이네. 이렇게 돈다고 뭐 어떻게 되나? 돌면 자기네들만 어지럽지. 왜 한 바퀴만 돌아. 아예 하루에 서너 번 돌지." 그렇게 수군대는 것만 같습니다.

하루가 지나갑니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나갑니다. 그러나 이 튼튼한 성은 요만큼도 금이 안갑니다. 무엇이 갈라지는 징조도 없습니다. 작은 돌이나마 부숴지는 소리라도 들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적막만이 성 주변에 감돌고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도대체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이 이 성을 함락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회의가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도 없잖아 있습니다.
이렇게 비무장으로 돌다가 갑자기 여리고 성문이 열리고 창칼을 든 군사들이 공격하면 어떻게 되는 건지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니 무슨 이런 전쟁이 다 있어. 전쟁을 하려면 성벽을 타고 올라가서 멋지게 한 판 붙어야지. 벌써 며칠째 성만 돌고 있는 거야?" 불평이 생길 법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내 생각하고는 너무 다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받아들여야 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그렇습니까? 엘리야에게만 그렇습니까? 아니요. 가끔, 아니 너무나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납득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충분한 설명이 아닙니다. 이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졌으면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삶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를 받을 때 이런 저런 형편과 상황을 들어가며 엘리야야 그럴 수 있지만 난 처지가 좀 다르지 않냐며 수많은 변명과 핑계를 늘어 놓는게 혹시 우리 아닙니까?
어쩌면 피할 구멍 다 세워놓고, 빠져나갈 궁리 다 해놓고, 자신에게 손해 보지 않을 구석 다 챙겨두고서 그제서야 순종하는 척 하는 것이 우리의 순종은 아닌지요. 슬-쩍 순종하는 척하면서 결정적으로 손해는 안보는게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요 정도만 손해보지 하는 인심쓰는 형태의 순종이 우리의 순종은 아닌지요.

너무나도 잘 아는 드와이트 무디. 어느날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신앙의 제자인 R. A. 토레이 박사를 데리고 시카고의 한 빌딩 꼭대기로 올라갑니다. 시원한 바람이 그들의 뺨을 훓어 내립니다. 시카고의 전역이 내려다 뵈는 그 빌딩 위에서 무디는 토레이에게 이야기합니다. "이봐 토레이, 만약말이야. 만약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이 빌딩 위에서 뛰어내리라고 명령하신다면 난 그럴 수 있을 것 같애."

고신 50주년
특별히 오늘 밤은 고신 교단 설립 50주년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고신 교단 50년을 돌아다볼 때 고신의 완고함에 실수도 없지 않았습니다.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나이 50에 어찌 반성할 것이 없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 앞서 살았던 그 무명의 신앙의 선배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기 위해 순교의 강줄기 위에 선명한 선혈을 뿌렸던 사람들입니다. 정말 말씀이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기 위해 무모할 정도로 목숨을 아깝지 않게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발버둥을 치며 살아온 것이 우리네 선배들의 신앙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신앙의 모습이 변모하고 교단의 중요함도 희석되어 갑니다. 격변하는 세계 속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시대의 흐름을 읽고 끊임없이 변해가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변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 앞서 살았던 그 신앙선배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앞에 순종하기 위해 발버둥쳤던 삶인 것입니다.

말씀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에게 떨어졌다는 것이 분명할 때, 아침에 읽은 성경본문이 명확하게 나에게 명령하셨다면,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을 두드렸다면 나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나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그것이 이해가 되든지 그렇지 않든지간에 여기에는 한 가지의 답만이 있을 뿐입니다.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 의식이 분명하던 엘리야를 시대의 등불로 쓰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던 그 용기있는 한 인생을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데 쓰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렇게 크든 작든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우린 절대 교회당 마당만 밟고 지나가는 그런 인생을 살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릴 그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우린 절대 시시하게 살다 갈 존재가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 위에서 사용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참 신이심을 당당하게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쓰실 것입니다.
믿음의 용기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부들부들 떨며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높이 들어 이 가짜가 진짜처럼 판을 치는 신앙의 암흑시대를 밝히는데 분명히 사용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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