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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역경의 열매] 교통사고를 딛고 일어선 김성자 전도사 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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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에 연재된 글을 이곳에 퍼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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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성자 (1) 교통사고로 무너진 세계적 모델의 꿈 

◇ 김성자 전도사 약력
1953년 충남 논산 출생 / 대전침신대 신학과 졸업 / 대전 극동방송 장애인프로 진행자 /
  현 대전대흥침례교회 협동전도사 및 간증사역자

1980년,세상은 온통 내것이었다. 늘씬한 키에 누구 앞에서나 자신 있는 외모,더구나 패션 모델로도 활동하던 나는 어디를 가나 환영을 받았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이유도 있었지만 천성이 착하다는 칭찬을 많이 들은 나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편이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던 나는 당시 대학입시 전에 치르던 예비고사에서 떨어져 서울로 재수를 하기 위해 올라왔다가 공부보다는 화려한 세계에 먼저 취해버렸던 것이다.

우리 연예인 친구들은 어디든 우르르 몰려 다니며 무수히 쏟아지는 시선들을 은근히 즐겼다. 그러면서 “안 예쁜 여자들은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깔깔거렸다.

나는 자주 보던 외국 패션잡지를 통해 외국을 동경했다. 서구적인 외모란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한국은 무대가 좁다고 느껴졌다. 외국에 나가면 내 꿈을 더 크게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당시는 해외여행 자유화가 안되었던 시절이라 외국에 나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나는 미국유학을 가기 위해 편법을 찾았고 300만원이란 거금을 주고 미국 비자를 불법으로 만들었다. 그 당시 서울 변두리 집 한채 값이 1600만원 정도 하던 때였다.

미국으로 떠나기 앞서 나는 친구들과 멋진 추억여행을 계획했다.

“가기 전에 신나게 한번 놀아보자. 서울을 출발한 뒤 내설악을 통해 설악산에 갔다가 동해안 도로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해운대와 태종대를 둘러본 뒤 서울로 오는 거야.”

내 친구들은 남자 친구들이 운전하는 승용차에 나눠타고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길에 올랐다.

1980년 7월4일. 이 날은 내 삶에 있어 BC와 AD가 나뉘는 것만큼이나 엄청난 분수령이 된 날이다. 나는 조금 뒤에 다가올 엄청난 사고를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채 남자친구가 운전하는 옆 좌석에 앉아 짓푸른 녹음을 즐기고 있었다.

장마철이었고 비가 내려 길이 미끄럽다는 생각을 했으나 우리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홍천을 넘어가는 고갯길,경사가 심한 곳에서 브레이크를 밟자 차는 빗길에 미끄러져 언덕 아래로 구르고 말았다.

당시 나는 잠깐 졸았던지 사고 순간의 기억은 전혀 없다. 내가 눈을 뜬 곳은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이었다. 어머니와 당시 그곳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언니의 절망스런 얼굴이 희미하게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나는 무려 10여일만에 의식을 차렸다. 그런데 가슴 아래로 전혀 감각이 없었다. 5번과 7번 척추뼈가 망가져 신경이 완전히 손상돼버린 것이다. 현대의학으로는 치료 가능성이 0%였다.

내가 자랑하던 얼굴과 몸매,하늘을 찌르던 자신감은 더 이상 없었다. 패션 모델이 한번의 사고로 다른 사람이 대소변까지 받아내야 하는 지체장애 1급 1호,이른바 중증장애인이 된 것이다.

나는 그 순간이 꿈이길 간절히 바라고 또 빌었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면 나는 벌떡 일어나 예전처럼 명동거리를 활보할 것이라고 스스로 주문을 걸곤 했다. 내 베갯잇은 눈물로 마를 날이 없었다.

누군가 ‘절망은 신의 출발’이라고 했던가. 이 말은 내게도 적용되는 최적의 격언이었다. 모든 것을 잃고 절망의 수렁을 해맬 때 주님은 나를 찾아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기까지의 시간도 내게는 결코 짧지 않았다. 하나님은 당신을 만나기 까지도 엄청난 고통과 시련의 시간을 요구하셨다.


2. 하반신 마비…휠체어에 실려 고향으로 

교통사고로 척추를 다친 나는 상반신 30%만 감각이 살아있고 나머지는 시체나 다름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병원생활 자체가 지옥이었다.

누구보다 깔끔하기로 소문났던 내가 아니었던가. 옷에 붙은 머리카락 한 올도 못 참아 하던 내가 대소변 조절을 못해 냄새가 날 때까지 몰랐다. 생리적인 현상 하나 의지대로 하지 못하고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고통스러웠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섭리의 시작은 중증의 장애를 가지는 것에 국한하지 않았다. 나의 자아와 가진 것을 철저히 비워내고 완전히 바닥에 엎드리게 만드셨다.

그것은 내가 엄청난 치료비를 하나도 받지 못하고 사고 보상비도 전혀 못 받는 무보험차를 타고 있었다는 것으로 시작됐다. 당시 나처럼 중장애를 입으면 보험회사로부터 8000만원 정도의 보상비와 매월 간병비 150만원이 나오도록 돼 있었으나 나는 해당이 안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인간적인 끈까지 완전히 잘라버리신 것이다.

병원에 찾아오던 친구와 친지들의 발길도 입원 서너달이 넘어가면서 딱 끊겼다. 변함없는 안타까움으로 나를 지키는 분은 오직 부모님뿐이었다.

“성자야,집에 가자. 여기서 더 무엇을 바라겠니. 어차피 네가 장애인이 될 팔자라면 우리와 사는 법을 빨리 익혀야 하지 않겠니?”

하기야 26년 전인 그 당시 한달 평균 병원비가 100만원을 넘었고 입원했던 1년 사이 2000만원이 고스란히 병원비로 날아갔다. 나는 눈물을 철철 흘리며 논산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청운의 꿈을 품고 올라갔던 서울에서 나는 휠체어를 실은 앰뷸런스로 귀향했다.

시골집 골방에 갇힌 나는 대인공포증에 시달렸다. 내가 전혀 움직이지 못하니 창살없는 감옥이었다. 하루 세 끼를 챙겨주고 대소변을 받아내는 어머니. 그 어머니도 결국 너무 힘드셨는지 “눈이 초롱초롱 떠 있는데 어디 물건이래야 내다버리지”라고 혼잣말로 한탄하실 때 내 가슴은 갈갈이 찢겨나갔다.

‘그래,내가 죽는 것이 모두를 살리는 길이야. 나도 고통스런 삶을 끝내니 좋고 부모님을 더 이상 고생시키지 않아도 되고 어떻게 죽는 방법이 가장 좋을까?’

그러나 나는 몸을 움직이지 못해 죽을 자유조차 없었다. 인간의 목숨은 질겼다. 죽음을 최선으로 생각했지만 다른 한쪽에는 두려움이 자리잡았다. 욕창으로 몸이 썩어도 모르는 나를 사람들은 마치 전염병 환자처럼 여겼고 나의 몸과 정신은 점점 황폐해져 갔다.

이렇게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살던 내게 중고교 동창이던 김해숙이란 친구가 찾아왔다. 대뜸 눈물부터 글썽거리던 친구는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나를 위로하려 했다.

“성자야,네가 이런 엄청난 사고를 당한 것은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야. 우리 인간은 아무리 잘나고 멋있고 잘살아도 영생을 얻지 못해 천국 백성이 되지 못하면 결국 실패한 인생이란다. 몸이 불편하고 또 고통 가운데 있어도 진정으로 주님을 만났다면 그것은 성공한 인생이란다.”

웃긴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이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남보다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런 일이 내게 생긴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친구의 표정과 말에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사랑과 안타까움을 분명히 읽었다. 그것은 그 누구에게서도 찾을 수 없었던 부모님이 내게 보여주신 무조건적인 사랑,바로 그것이었다.


3. 꽉닫힌 마음 열어준 ‘사랑의 밀물’ 

나는 값싼 위로보다 현실을 인정하고 자존감을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상태였다. 그러나 현재의 나,가슴 아래를 모두 잃은 하반신 장애를 인정할 수 없었던 내게 친구의 헌신적인 사랑은 그런 내 마음을 조금씩 녹여내는 봄햇살이었다.

친구는 교통이 별로 좋지 않은 우리집에 버스를 갈아타고 수시로 찾아왔다. 나는 다른 이들처럼 몇 차례 오다 말겠지 했지만 친구는 아니었다.

또 언제나 내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물건들을 선물해 고마움을 느끼게 했다. 나는 친구가 전하는 예수 이야기는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친구의 사랑과 헌신에는 감동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못 올 때에는 편지와 소포로 계속 사랑을 전했다.

“성자야,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야. 우리가 그분의 존재를 인정하고 구주로 모셔들일 때 우리의 삶은 보석처럼 빛나게 돼. 우리의 육신은 잠깐 살다가 썩어지는 것이지만 우리의 영혼은 영원히 살아있단다. 마음문을 열고 주님을 모셔들여 보려무나.”

친구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비롯해 성경말씀을 읽어주며 내게 열심히 전도했지만 깊은 상처와 고통으로 움츠러든 내 마음은 육중한 철제 대문처럼 열릴 줄 몰랐다. 친구의 전도는 내게 사랑은 느끼게 했지만 예수를 알게 하진 못했다.

이런 내게 하나님은 다른 방법을 쓰셨다. 1984년 유명한 라디오 프로그램 중에 ‘이종환의 디스크쇼’가 있었다. 친구는 여기에 내 사연을 꼼꼼히 적어보냈다.

나는 내 이야기가 방송을 탄 것에 깜짝 놀랐다. 더구나 내 사연을 소개하면서 진행자인 이종환씨도 안타까움이 잔뜩 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해주었다.

“이성자씨에게는 지금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고통 속에 잠겨 있을 그녀를 일으키고 용기를 줄 수 있는 사랑과 응원의 글을 청취자 여러분이 보내주셔야 합니다.”

방송의 힘은 컸다. 내 주소가 소개된 탓에 전국에서 편지와 소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모두 사랑의 편지들이었다. 하나같이 나를 격려하고 소망을 잃지 말 것과 현실을 이겨낼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사랑을 보내주는 것에 감동했다. 나보다 더 절박하고 어려운 환경임에도 그것을 잘 이겨 나가고 있는 사연을 듣고 내가 오히려 창피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나는 이 훈훈한 사랑의 천사들에게 답장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메말라 있던 감성을 살려준 그들이 너무나 감사했다. 나는 사고 후 처음으로 펜을 잡았다.

나는 사랑을 느끼게 해준 친구에게 가장 먼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꽃을 그린 카드를 보냈다. 그리고 편지를 보낸 분들에게도 차례로 감사편지를 썼다.

사랑은 부메랑인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사랑을 받기만 하고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던 때는 언제나 차디찬 한겨울이었었다. 그러니 꽃도 필 수 없었고 나비와 벌도 찾아들 수 없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사랑으로 마음문이 열리자 내 마음은 순식간에 훈풍으로 뒤덮이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다.

사랑의 힘은 놀라웠다. 창가에 비치는 아침 햇살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집앞 느티나무에서 그런 생명력이 느껴지는 줄 예전엔 몰랐었다. 장애인인 내가 부끄럽고 한스러웠던 마음이 사라지면서 이제 나를 인정하고 살아야 한다는 의욕이 생겼다. 지금 생각하면 친구의 중보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4. 주님 영접한 순간 뜨거운 은혜 체험 

모든 것에는 때가 있었다. 사고에 따른 고통과 절망의 나락에서 허우적거리던 내가 친구와 모르는 사람들의 편지를 통해 사랑을 먹고 마음의 창을 열게 되자 ‘복음’은 단지 말씀이 아닌 생명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친구가 읽어주는 성경이 이제는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안겨들었다. 성경에는 나를 모델로 쓴 듯한 구절이 많았다.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시 71:20∼21)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말씀에 조금씩 은혜를 받아가던 나는 어느 여름날 밤 드디어 주님을 뜨겁게 만났다.돌이키면 때가 찼기에 이루어진 일이겠지만 참으로 우연한 사건이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벽에 걸린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었다. 바로 그 때였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사실로 다가오며 예수님의 그 아픔이 내게 깊숙이 전달돼 왔다. 십자가상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연상되며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내렸다. 내 눈은 고장난 수도꼭지였다.

다음날 아침 예전에 편지를 통해 사랑을 느끼고 마음이 열렸던 그 느낌과는 또 다른 엄청난 기쁨이 내 몸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내 입에서는 난생 처음 감사기도가 터져나왔다.

“하나님,감사합니다.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없는 것을 슬퍼하며 나 자신을 괴롭혔던 것을 회개합니다. 아직 제겐 두 눈이 있어 볼 수 있고 두 손이 있어 움직이며 입이 있어 먹고 말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를 영접하자 내게 세 가지 변화가 생겼다. 먼저 내가 장애인이란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예전의 내 모습만을 생각하고 현재의 나를 괴롭혔는데 결국 그것은 내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두번째는 재활에 대한 의지가 솟았다. 그저 누워만 있던 내가 앉아있는 연습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10분,다음엔 20분,점점 앉아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세번째는 성경을 읽으며 그 안에 삶의 무한한 진리와 지혜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기도하며 성경을 읽는 시간이 늘어났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는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사이 어떻게 표정이 이렇게 밝아졌느냐고 놀라워했다. 나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복음은 무한한 생명력으로 나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주님을 만나 감격 속에 하루하루를 지내던 나는 삶의 목표를 정했다.그리고 그것을 위해 매일 기도했다.

“사랑의 주님,이 부족한 죄인에게 주님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저는 제가 고통 속에서 주님을 감격적으로 만난 것처럼 저처럼 고통속에 있는 장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도울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그들이 주님을 만나는 도구로 사용해 주옵소서.”

이때부터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해나가기 시작했다. 편지를 써서 복음을 나누고 전화로 전도했다. 점자책을 신청해 점자를 배웠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기쁨과 감사로 하게 하셨다.

우리 인간은 어려움에 처하면 먼저 인간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다가 안되면 하나님을 찾는다. 우선순위가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 모든 해답이 숨겨져 있음을 깨닫는 것도 복이다. 내가 일찍 그런 사실을 알았더라면 허송세월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5. 장애우와 함께한 극동방송 리포터 

내가 그리스도의 은혜 속에 온전히 변화된 증거는 의심으로 가득찼던 성경의 내용이 사실로 믿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출애굽했고 신명기 33장 29절로 믿음이 커졌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하나님의 영이 나와 함께 임하고 계신다는 확신은 삶 전체에서 두려움과 어둠을 몰아냈다. 말씀은 내게 기도가 되고 세계를 품을 수 있게 했다.

장애인선교단체를 돕는 일을 시작하며 극동방송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리포터 일을 맡게 됐다. 몸도 불편한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하나님은 용기를 주셨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우리나라 장애인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고통 받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게 됐다. 부여에 있는 ‘사랑의 울타리’라는 단체에서 홍보담당 간사로 일하며 장애우들의 복지 증진을 위해 열심히 뛰었다.

하나님께서는 1997년 집에서 독립하도록 해주셨다. 그동안 이 문제로 계속 기도해 왔는데 12평짜리 영구 임대아파트를 140만원에 얻어 들어가게 된 것이다. 나는 이곳에 와서야 하나님께서 왜 홀로 서기를 하도록 하셨는지 깨달았다.

이곳은 홀로 사는 노인,소년소녀가장,장애인 등 도움이 필요한 사는 아파트였기 때문에 주위에는 모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었다. 나는 43세의 지체장애인인 우진이와 소년소녀가장 명희와 쉽게 친구가 되었고 아예 식구처럼 지내기 시작했다.

자원봉사자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 천사처럼 나타나 내가 필요한 부분들을 채워주곤 했다. 나는 또 내게 들어오는 것을 또 아낌없이 주위 사람과 나누었다.

나는 지금도 ‘하나님의 계산법은 창고를 비울수록 더 많이 채워진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나중을 생각하고 미래를 대비해 항상 창고가 차 있기를 원하고 기도한다. 그러고 거기에서 일부를 떼어 나누고 남아 있는 것에 안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자신의 몸과 마음 뿐 아니라 물질까지도 하나님이 원하실 때 아낌없이 드리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이후 내가 한번도 궁핍을 느끼지 않도록 인도하셨다.

우리는 물질을 하늘나라에 쌓아두라고 언제나 권면받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나는 이 나눔의 은사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기 때문에 억지로 할 게 아니라 그런 은사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극동방송 리포터로 활동하던 내가 이번에는 ‘사랑의 꽃이 되어’라는 장애인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회자가 되었다. 놀라워 하는 내게 당시 대전극동방송 본부장이셨던 유관지 목사님은 “하나님의 사역은 세상의 학식이나 유명세가 있는 사람보다는 준비되고 훈련된 자를 쓰시길 원하신다”며 격려해주셨다.

하나님은 나를 세상에 점점 드러내놓기 시작하셨다. 이를 위해 나는 이웃과 사회를 위해 더 열심히 일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로 나를 넘치게 채워야 했다. 말씀은 깊이 들어갈수록 더 오묘하고 은혜가 충만했다.

주위의 권유도 있었지만 나는 1998년 대전침례신학대학교에 입학할 것을 결심했다. 하나님은 모든 조건을 구비해놓고 나를 기다려주셨다.


6. 14세 연하 자원봉사자가 청혼 

신학을 공부하게 된 동기도 특별하다. 장애인 소녀가장 등과 생활하면서 말씀 속에 깊이 빠져 있던 1998년 여름. 내가 출석하던 대흥침례교회 성도들과 태국에 단기선교여행을 다녀왔다. 늘 골방에 갇혀있던 내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난다는 것은 꿈에서나 생각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 무렵 내게 복음을 전했고 늘 옆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던 친구 김해숙 집사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

“성자야,너를 위해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셨어. 세계를 다니는 전도자로 너를 쓰신다고 하는구나. 그러니 지금부터 더 열심히 기도하고 준비해. 신학공부도 하는 것이 어떻겠니?”

그해 처음 대전침례신학대학에서 야간부 학생을 모집,원서를 내고 입학했다. 아마 수능을 봐야 했다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텐데 내가 입학한 다음해에 야간이 사라져 주간으로 공부하게 됐으니 참 놀라운 일이었다.

상담학을 전공키로 했다. 장애우들의 내적 상처를 치유하고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상담학을 배워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신학을 시작하자 등록금을 비롯해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이 미리 준비돼 있다가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곤 했다. 나는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만 돌리면 됐다.

신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지금까지 받은 그 어떤 것보다 귀하고 좋은 선물을 받았다. 하나님의 오묘하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 드리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1999년 2월 장애인캠프에 참석한 나는 한참 동생뻘 되는 한 청년을 내 휠체어를 밀어주는 자원봉사자로 소개 받았다. 자신의 이름이 김성덕이어서 ‘성덕 바우만 입니다’라고 소개하는 청년의 웃는 모습이 매우 맑았다.

나보다 14세 연하인 그의 도움을 받아 재미있게 지냈는데 알고보니 그 청년도 장애인이었다. 삼성전자에 근무하던 그는 퇴근하다가 버스에 치여 20일 동안이나 의식불명 상태에 있다가 깨어났다고 했다. 이 때문에 약간의 언어장애와 청각·후각장애를 갖고 있었다.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하기가 힘들어 쉬던 중 하나님을 뜨겁게 만났고 기도하는 가운데 장애인캠프 봉사자로 온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김성덕씨가 나를 만나 여러 대화를 한 후 나를 배우자감으로 생각했다는 데 있었다. 정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일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믿음이 신실하고 인상이 좋으며 장애인이라도 살림을 잘하는 자매,지혜가 많고 말을 잘하는 자매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바로 그 응답이 나라는 것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는 의외로 열정적이고 집요했다.

그 무렵 나는 지속적으로 도와줄 동행 도우미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학교를 오가는데 도우미가 자주 바뀌어서 불편했던 것이다.

내가 펄쩍 뛰면서 다른 자매를 소개시켜주겠다고 달랬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오직 나를 원했다. 내가 그에게 마음이 돌아서는 계기가 된 것은 어느 날 대소변이 묻어 버리려던 내 옷을 빼앗아 빨아주는 것을 보고나서부터였다. 그는 냄새를 맡지 못하니 이런 일이야말로 자신에게 딱 맞는 일이라며 자신만만해 했다.

나는 여자로서 아내로서 제 역할을 전혀 못하는 상황이지만 오히려 나를 돕겠다는 그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며 주님이 허락하시는 정말 귀한 배필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어갔다. 그는 나의 망가진 몸을 대신할 수 있고 나는 그의 입을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7. 남편과 동행 신학교 생활‘기쁨의 나날’ 

나와 김성덕 집사의 결혼은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았을 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양가의 반대도 심했다. 그런데 김 집사는 뇌를 다쳐 지능이 좀 떨어지긴 해도 청소와 빨래,설거지 등의 봉사를 너무나 즐겁게 하는 것이 신기했다. 더구나 후각이 마비돼 가장 고역인 내 용변 처리도 자기 몫이라며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우리는 드디어 혼례예배를 드렸다. 하나님께서 주신 배우자라는 확신 속에 서로를 의지하며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길을 갈 것을 다짐한 것이다.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축하하고 크게 기뻐해주었다.

남편과 동행해 공부하는 신학교 생활은 마냥 즐거웠다. 특히 중증 장애인을 도와주는 차량도우미 자원봉사단체인 대전 되살미차량봉사대(김장섭 대장)의 도움은 내가 4년 동안 공부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하나님의 선물은 또 있었다. 신학교 식당에서 식사하는 우리 부부를 본 식당 사장님 부부가 우리에게 언제라도 식사할 수 있도록 하루 세 끼 식권을 제공해주신 것이다. 나는 신학을 하도록 모든 여건을 부족함 없이 챙겨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고난도 있었다. 책상에 너무 오래 앉아있다 보니 욕창이 생겨 대수술을 해야 했고 이 때문에 학교를 1년 휴학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은혜는 늘 차고 넘쳤다.

처음엔 신학공부를 인도하신 하나님이 왜 또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 원망스러운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하자 늘 장애우들만 바라보던 내 시선에 새롭게 육체의 아픔을 지닌 환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도 다른 의미의 장애인들이었다. 아픈 육체를 치료 받으면서 마음까지 치료 받아야 할 사람이 정말 많았다.

나는 입원해 있으면서 병원이 또 다른 내 선교 현장이라고 생각하고 복음 전하는 일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이웃들은 중증 장애인인 내가 쏟아놓는 감사의 말에 놀라움을 표시하다가 복음에 감염되곤 했다.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내가 환한 웃음과 평안함,긍정의 언어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신기해 했다. 그것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샘솟듯 우러나오도록 넘치게 주시는 은혜였다.

그 무렵 고향 어머니가 퇴행성 관절염으로 거의 거동을 못 하시게 되셨다. 평생을 나 때문에 애를 태우시고 돌보아주셨던 어머니가 나처럼 움직이기 못하게 되셨다니 마음이 아팠다.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 어머니를 전도해 근처 교회에 나가시도록 해드렸는데 나이도 많고 혼자 계셔서 더 힘들어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를 대전 우리집으로 모셔왔다. 그런데 남편은 어머니도 나 이상으로 정성껏 돌보았다. 나중에는 대소변을 받아내야 할 정도까지 되었는데 남편은 묵묵히 어머니와 나 두사람을 모두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남편은 나와 어머니를 보살필 때 언제나 찬송을 불렀다. 박자가 안 맞고 가사가 틀려도 나는 그 어떤 찬양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우리 부부의 이런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도 특별하게 보인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KBS MBC 등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찾아와 우리가 사는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방송하기도 했고 여성잡지에서도 우리 이야기를 자세히 다루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간증전도자로 세우기 위한 서곡이었다. 그리고 내 소식을 몰랐던 사람들과 다시 이어주는 끈을 만들어 주었다. 그 중에서도 서울에서 목회하고 계신 전태규(서광교회) 목사님과의 만남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예비해주신 것이었다.


8. “하늘나라 확장 기여”…사명감 샘솟듯 

하나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35년전에 이미 나를 전태규 목사님과 만나도록 하셔서 오늘날 내가 세상으로 나가 열심히 전도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셨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공주여고에 다니며 하숙하고 있을 때 나를 언니라고 부르며 따르던 초교 6학년 여학생이 있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전병권 목사님이셨는데 목회지가 바뀌어서 사택으로 이사하셨다. 그러나 당시 중학교 입시가 있던 때라 혼란이 없도록 따님을 전학시키지 않고 공주에서 하숙하도록 하셨다.

당시 나는 공주여고 밴드부 지휘자와 걸스카우트 단장을 맡아 매우 바빴던 때라 하숙집에서는 잠만 자고 다녔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아이의 오빠가 대학입시를 앞두고 같은 집에서 동생과 몇 개월 함께 생활했는데 바로 전태규 목사님이다. 당시 나는 목회자의 자녀들이었던 그들이 평범하게 보여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이후 소식은 전혀 몰랐다. 전태규 목사님은 부친의 뒤를 이어 신학교에 진학해 목사가 되셨으며 지금은 중진 목회자로 국내 기독교 감리교단에서 활발히 사역하고 계신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공주여고 출신이자 동창인 한 사모에게 내 소식을 물어보셨던 것 같다. 그런데 그토록 건강하고 활동적이던 내가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어 대전대흥침례교회에 다닌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내 연락처를 알아내셨다.

내 간증을 자세히 들으신 후 누구보다 안타깝게 여기신 전 목사님은 이때부터 내가 간증사역자로 나설 수 있도록 헌신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으셨다.

친분이 있는 목사님들께 전화하고 편지를 보내 나를 적극 추천해주셨다. 그래서 지난해 4월 처음 뵌 후 지금까지 70여 교회에서 간증을 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그래서 간증할 때마다 큰 사명을 느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를 따르던 전 목사님의 여동생은 외교관 부인으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니 믿음의 뿌리가 귀한 열매를 맺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면을 통해서나마 전태규 목사님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힘들긴 했지만 지난해 대전침례신학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했다. 많은 분들로부터 격려와 꽃다발을 받으며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이제 주님의 종으로 바르게 쓰임 받아 하늘나라 확장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다짐했다. 출석하던 대흥침례교회에서 나를 협동전도사로 임명해주셨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주님을 모르고 스스로를 자학하며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었던 저를 구원의 반열에 들게 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옛 것은 모두 버리고 또 잊게 하시고 온전히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의 일을 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이때 내가 주님을 뜨겁게 만났을 때 주셨던 여호수아 1장 9절 말씀을 다시 주셨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가슴 밑바닥에서 새로운 용기와 자신감이 독수리가 창공을 힘차게 나는 것 같은 기쁨이 솟아올랐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생각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오히려 내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더 많은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9. “장애우들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주님을 뜨겁게 만난 벅찬 감동이 있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천하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옥에 갈 영혼을 생각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픈가. 특히 가족이 주님을 모르고 있는데 그대로 방임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님을 뜨겁게 만난 확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 영혼 구원에 대한 뜨거움으로 한시도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특히 세상에서 고통 받으며 힘든 삶을 영위한 장애우들이 천국에도 가지 못한다면 너무나 억울한 일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으로 그들을 전도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 대속과 부활를 믿으면 매일 읽는 성경말씀이 생명수가 되어 삶의 갈증을 풍성히 풀어준다. 하나님이 부족한 나와 함께 하시고 깨달음을 주시고 기도로 대화하고 영으로 만나주심은 기독교인만이 갖는 특권이며 영광이다.

인간을 의지하면 실망과 낙담하게 되지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면 다소 늦더라도 결코 실망하는 법이 없다. 나는 고난이 내게 유익이 되었다는 성경의 진리를 이 땅에 큰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우리가 추구하는 인간의 외모와 소유보다 한 영혼이 얼마나 귀한지를 날아다니며 알리고 싶었다.

내가 초청 받는 곳은 교회에 국한되지 않았다. 관공서와 대덕단지,청소년수련회 등 수많은 곳에서 간증 및 강연 요청이 들어왔다. 휠체어에 앉아 강연하는 내 얼굴만 보는 그들은 내가 마비는 됐지만 건강하게 잘 지내는 줄 안다. 그러나 내가 한번 움직일 때 느끼는 여러 고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차를 타고 가는 것도 힘들지만 식사와 물도 마음대로 먹지 못하고 상체 곳곳에 아픈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내가 이런 고통을 무릅쓰고 간증에 나서는 것은 간증을 통해 한 영혼이라도 더 주님을 만나게 해야 한다는 염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몸을 가진 나도 죽을 힘을 다해 주님을 증거하는데 주님의 은혜로 정상적인 몸을 받은 여러분이 주님을 증거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직무유기이며 태만이다.

나는 1994년부터 공주 장애인공동체 밀알의 집에 몸담아 홍보간사 일도 하며 지원과 도움을 주는데 앞장섰다. 그리고 장애우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일체감을 가졌다.

이렇게 나름대로 전도하고 봉사하는 헌신의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내게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이어주고 알게 해 도움이 되도록 ‘축복의 통로’를 만들어주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고 교제하고 나눌 때 하나님은 여러 가지로 놀라운 일을 만들어 주신다. 대부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사람을 통해 이뤄진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서로 권면하며 중보기도해줄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그만큼 가까이 세밀하게 느낄 수 있다.

내가 그토록 속을 썩였던 어머니는 나와 함께 지내며 행복해 하셨다. 돌아가시기 수일 전 어머님이 내게 하신 말씀이 언제나 귓가를 맴돈다.

“하나님은 정말 놀라운 분이시구나. 너와 사위를 맺게 하신 것이나 사위가 내 뒷바라지를 이렇게 정성껏 하니 말이다. 나 먼저 갈테니 둘이 재미있게 살다오너라. 나는 이곳에 와서야 몸 성할 때도 못 가본 속리산과 대천바다 곳곳을 휠체어를 타고 구경했구나. 교회 식구들도 맛있는 반찬을 매일 해와서 고맙고…난 너무 잘 지내다가 하나님을 만나러 가니 절대 울지 말아라.”

어머님은 내게 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느끼고 기쁘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10.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 갚는게 내 사명” 

주님을 만난 후 나는 지나간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남은 시간을 더 아끼고 소중하게 여겨 내게 주신 사명을 더 열심히 감당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지금 열심히 간증을 전하고 있지만 이것도 잠시일 뿐 내가 진정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기도했을 때 주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세상에 버림받고 소외된 장애우들과 함께 웃고 울라”고 하셨다.

장애우들은 그들이 진정 아파하는 본질은 이해하지 못한 채 외부로 나타나는 것만으로 쉽게 판단하는 것에 마음문이 열리지 않는다. 값싼 동정 보다는 마음으로 다가가는 사랑과 배려,기도가 변화를 만든다.

나는 남편과 기회가 되면 정말 시골 오지,골방에 갇혀 몇십년간 외롭게 지내는 장애우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자비량 순회전도사가 되고 싶다. 나도 누구 못지 않은 장애를 갖고 있고 그들을 찾아가 전하는 복음은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리라 믿는다.

또 교회를 대상으로 고아입양사업을 벌이고자 한다. 한 교회가 한 가정을 선정,한 고아를 맡아 양육을 책임진다면 이 땅에 더 이상 사랑에 굶주린 고아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나라가 고아수출국이라는 오명을 벗고 한국 친부모를 찾아 헤매는 입양인들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으면 한다.

조용히 나를 살펴보니 나는 주안에서 정말 사랑에 빚진자이다. 내가 받은 수많은 사랑을 갚는 것은 그저 기도밖에 없음을 느끼며 오늘도 그 손길들을 하나하나 기억한다.

조인식 장로님은 새까만 농부의 모습으로 매년 쌀을 싣고와 우리 밀알장애인공동체에 풀어 놓으셨는데 소천 후에는 부인 권사님과 자녀들이 계속하고 있다.

우리 일이라면 무엇이든 헌신적으로 채워주시는 마태목장 목자이신 조용근 장로님,분당샘물교회(박은조 목사) 사랑부 이지훈 이양순 집사님 부부,치과병원 원장인 윤화중 장로님,윤석경 교수님 등 사랑의 천사들을 하나하나 기억하면 열 손가락이 여러번 돌아가야 할 정도다. 그 분들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공급자로,사랑을 채우는 봉사자로,아픔을 치유하는 의사로 항상 우리 곁에 계신다.

특별히 감사한 것은 사고 전에 알고 지냈던 영화배우출신 방희 집사와,대중가수였다 복음가수로 변신한 데보라 선교사와도 정말 오랫만에 만나 믿음의 교제를 나누게 하시니 이 역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계속되는 장애인 사역과 빠듯한 간증집회 일정으로 몸이 너무 힘들어 “하나님 너무 힘듭니다. 좀 천천히 저를 몰아가세요. 너무 고통스럽습니다”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 바로 은혜며 감사의 조건”이라는 사실이었다. 고난이 함께하는 복음은 더 큰 역동성으로 다가간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고백 속에 전해지는 복음은 ‘살고 살리는’ 비밀이 담겨 있다.

요즘 내 곁에는 가족도 떠나고 홀로 남겨진 장애우들이 점점 더 늘고 있다. 그들에게 삶은 고통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는 축제의 날들임을 인식시키는 임무가 내게 주어진 것이라 믿는다.

참 할 이야기도 많고 간증도 많지만 여기서 연재를 줄이고자 한다. 직접 여러분을 만나서 얼굴을 맞대고 좋으신 하나님을 뜨겁게 소개하고 싶기 때문이다. 큰 교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도 좋지만 작은 교회,장애인이 많은 곳에 더 자주 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김성자 전도사 연락처 016-402-3940).


정리=[국민일보] 김무정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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