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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이승율 <2> 원하던 중학교 못 가 비뚤어진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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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48년 경북 청도에서 전통적 유교 집안의 5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종영과 어머니 박정리는 일제 강점기 소학교 동창이셨다. 두 분은 같은 반에서 공부했는데 어머니가 반장을 했다고 한다.

외동아들로 귀하게 태어난 아버지는 대구에 있는 경북중에 유학을 간 반면 자식 많은 집안의 다섯째 딸인 어머니는 진학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6·25전쟁 때 학도병으로 차출돼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살아 돌아와 경상북도 교육공무원이 되셨다. 유가의 가풍에서 자란 아버지는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고 개인전을 열고 대구화단에서 평가받을 정도로 글씨와 그림에 능하셨다.

어머니는 소학교밖에 안 나왔지만 생활력이 강하고 똑똑하셨다. 결혼 이후 불교에 귀의해 대구불교여신도회 지부 회장을 지내셨다. 전국 주요 사찰마다 내 이름을 올리고 불공을 드릴 정도로 유명한 보살이었다.

그러니 나는 유교와 불교의 가풍을 이어받고 자란 셈이다. 부모의 훈계와 질책을 받으며 자랐고 맏이로서 의무감이 컸던 기억이 난다.

청도 고향에서 2학년 때 대구 중앙초로 전학했다. 아홉 식구가 셋방살이를 했다. 그러다 보니 4∼6학년 땐 친구 집에 가서 함께 공부도 하고 먹고 자는 일이 많았다. 공부 잘하는 반장이었기에 통했다. 운동도 잘해 5학년 때엔 야구부에 들어갔다. 그 시절 유달리 탐구정신이 강하고 한번 일에 몰두하면 끝을 봐야 했던 성격이었다.

당시는 중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이었다. 나는 지역 명문 경북중에 응시했고 당연히 합격할 것으로 기대했다. 중앙초에서 한 해 60∼70명씩 경북중에 합격했는데 나는 최상위권 성적에 체력장도 우수했다.

그러나 탈락했다. 선생님들의 권유로, 체력장 특차전형을 처음 도입한 경북사대부중에 응시한 게 화근이었다. 경북사대부중 면접일과 경북중 필기시험일이 겹치면서 ‘이중응시 탈락’ 규정에 걸린 것이다. 다시 도전하겠다고 울고불고 매달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늘을 찌르던 내 자존심은 무너졌다. 큰 좌절이었다. 어째서 내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나는 오랫동안 이해할 수 없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아닌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어쩔 수 없이 후기(2차)인 D중에 응시했다. 수석 합격했다. 입학식은 참석했지만 그 뒤로 등교하지 않았다. 아니, 갈 수가 없었다. 자존심 강한 어머니가 한사코 막았다. 두 달 후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교장을 만나러 갔다. 경북중에 보결(補缺)로 들어가겠다고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이 학생이 2등만 했어도 허락하겠어요. 수석 학생을 어떻게 남의 학교에 보냅니까.”

이번엔 D중 교장이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D중에 주저앉게 됐다.

그때부터 나는 집안에 있으면 필요한 말 아니면 한마디도 안 하는 반면 밖에 나가면 내 세상처럼 돌아다니는 상반된 성격으로 커갔다. 중2 때부터 담배를 물고 다녔고 불량서클에 가입해 집단 패싸움을 벌였다. 이 일로 7∼8명이 퇴학과 정학 처분을 받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나는 벌을 모면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수석 입학생인 데다 성적이 우수한 편이고 각종 과학경시대회에서 수상한 덕을 본 것 같다.

이처럼 너무 일찍 찾아온 좌절과 실패의 아픔은 너무 오랫동안 내 인생을 그늘지게 한 덫이 되고 정신적 고뇌의 진원지가 됐다.

정리=정재호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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