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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 이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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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의 철학자였던 한 사람이(사람 이름이 가물가물...)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말(馬)이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있다면 그들의 신의 모습은 말의 모양을 하고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참 재미있는 말입니다.  그 말을 증명이라고 하듯...아래 신동명전도사님의 글에도 있듯 지금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수의 이미지를 한 번 생각 해보시면 아마 고개를 끄덕여질 것입니다. 파란 눈동자, 갈색 머리 오똑한 콧날 등등...하지만 예수님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은(아시아지역) 갈색머리가 아니라 검은색 머리이며 눈동자 역시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서양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서양인이 예수의 이미지를 그렸기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소위 말하는 \'성화\'라는 것 그리고 \'성가곡\'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심에서 나온 작품이 아니라 귀족들을 위한 작품 즉 그림을 그려주고 돈을 받는 그런 작품이며 돈을 받고 작곡하는 그런 시대의 유산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선 이것에 반대해서 갓쓴 예수의 이미지를 보셨을 것입니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예수의 모습을 각자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통해서 예수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정보력의 총 집합체입니다. 문제는 그 예수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예수와 달똥(제 어릴적 동그란 딱지-당시 동 딱지라고 불렀음-놀이에 사용한 단어..요즘 말로 하면 동일한가 정도...)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유대인도 예수(메시야)를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를 죽었다는데 주목을 해야 합니다. 그럼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예수의 이미지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이하 패션이라고 할께요)에 나오는 예수의 이미지를 서로 비교해 봅시다. 패션에서는 제목에서 처럼 예수님의 고난에 모든 초첨을 맞춥니다. 그리고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냅니다. 아마 이부분에서 많은 사람의 감동을 받아냅니다. 살점이 뜯겨져 허공을 날라다니고 거기에 붉은 피의 현장... 우리나라에서도 주기철 목사님의 일대기를 그린 \저 높은 곳을 향하여\란 영화가 있었죠 그때 주기철 목사가 못을 박은 널판지위로 피를 흘리며 복음성가(서쪽하늘 붉은 노을인가..이거도 가물 가물하네요...기억이)를 부르며 걸어갔을 때 거의 모든 영화 관람객(아마 거의 신자였을 거라고 생각이 됨)이 울음 바다가 된적이 있었습니다. 동정심이라고 하죠...지금 추미애 의원의 3보 1배나 박근혜 대표의 눈물의 호소등.... 아마 패션을 보신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부분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멜깁슨 역시 그런 인터뷰를 했고 교황,추기경,목사님들의 평 역시 그러합니다. 여기에 비해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누가복음 23:28절의 말씀인데 앞 뒤 내용은 이러합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위하여 웁니다.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치며 슬피 웁니다. 여기 \운다\라는 말속에는 예수님의 고난이 함축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28절에 \예루살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말고 너희와 너희자녀를 위하여 울라\ 내 고난에 대해서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뒤에 나옵니다. 31절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생명을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게(31절에는 \푸른 나무\라고 표현) 조차 이러하는데 마른나무(생명이 없는 즉 예수님의 고난으로 인해 우는 자들)는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에게 은혜끼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언약으로 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보면서 \얼마나 아플까 괴로울까\이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죽은 너희들은 이것보다 더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말씀에 \저는 그 앞에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이 아무렇지도 않은데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자, 금식하자,이런 경거망동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십자가의 사건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강도의 고백이지 않습니까. 여기에 십자가의 위대함, 하나님의 언약의 완전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이벤트가 아닙니다. 오늘 ctn뉴스를 보니 십자가 행렬을 하더군요.. 제가 그것을 보고 한참 웃었는데...십자가는 진짜 통나무로 만든 것 같은데(꽤 무겁게 보이더군요) 땅에 끌리는 부분에 바퀴를 달아더군요...이런 이벤트는 정말 버려야 합니다. 사순절,성 금요일, 금식(하루 금식하고-금식하기 전에도 폭식을 하죠- 그 다음날 폭식하고..이게 뭡니까).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홀로 완성하신 십자가에 대한 도전입니다. 아무튼 이런 관점에서 전 패션을 봤습니다. 글이라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마디로 하면 \예수님의 고난에 나를 대입(代入)하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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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인터미션 2004.04.10. 02:27
목사님의 글을 읽고, 눅23장의 주석을 찾아보았습니다. 멘튜헨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네요.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우리는 여기서 희생제물이 되기 위하여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은 하나님의 어린 양, 그러나 축복 받은 예수님을 대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비난하고 헐뜯었으나, 일부의 사람들은 그분을 불쌍히 여겼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분의 원수들에 대한 승리였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었고, 우리를 위한 영생의 획득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애통해 하지 말고, 그분을 죽음에 이르게 한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죄로 인하여 애통해 하자.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볍게 여기고 그분의 은혜를 거부할 때에 생기게 될 고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애통해 하자.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희생양으로 그리스도께 이와 같은 고난을 주시는데, 이 사악하고 부패한 세대의 사람들이 여전히 마른나무와 같이 헛되이 행한다면, 그분의 희생은 무엇이 되겠는가?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신 지독한 고난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해 준다. 그리스도와 비교한다 하면, 아무리 위대한 성인이라 하여도 마른나무와 같을 것이다. 그분께서 고난받으셨는데, 우리는 왜 그런 고난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죄인들에게 떨어질 저주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스도의 받으신 고난은 가장 극악한 죄인들도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 다른 주석들도 대동소이 한 것 같습니다. 이창섭 목사님의 말씀이 이런 내용이라면 동감합니다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마16:24절 말씀처럼 자기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이벤트가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 하지만 그것을 기념하고 십자가의 사건과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며 그 고난에 숨어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감사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장낙중 2004.04.10. 02:27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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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명 2004.04.10. 02:27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비슷한 생각인데 표현이 다른 것이겠지요.. 히브리서 12장 2절 말씀에 \저는 그 앞에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라는 말씀은 목사님 말씀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참으셨다는 것\ 이죠.. 우리는.. 그 예수님의 참으심..그 고난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하구 있구요.. 우리가 감히 그 고난에 어찌 참여를 하겠습니까.. 그저.. 그 예수님의 참으심에 대해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갖고자 할 뿐이지요... 금식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방편일 뿐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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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규 2004.04.10. 02:27
앗...교회갈 시간이 다되었다...한참 읽다보니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음...코멘트는 교회다녀와서...(것참...이런 코멘트도 달다니...나도 참...)
정성환 2004.04.10. 02:27
예전에 한번 감상평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모두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고난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느냐 하는 것일 겁니다 나와 아무런 관련도 짖지 않고 단지 우리나 세상 사람들을 위한 큰 범주에서만 생각한다면 각자에게 다가오는 사랑과 은혜와 감사는 분명 큰 차이를 보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영화가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대한 열정과 자기 반성과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계기가 됐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를 봄에 있어서 눈으로 보기 보다는 가슴으로 보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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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규 2004.04.10. 02:27
음...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제 자신을 대입해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혹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는다고 하면 나는 견디어 낼 수 있었을까? 예전에 \침묵(엔도 슈사쿠)\이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고난의 현장에 있었지만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동일한 상황속에서 나는 그 고난을 당한다면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어 낼수있을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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